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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Oct 08. 2023

보라카이에선 무얼 입을까 1

D-48

해외여행 경험 자체가 적어서 그런지 더운 나라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혼자 갔던 여행지는 일본과 유럽이었고 신혼여행도 유럽으로 갔기에 그곳에서 입을 옷으로 특별히 고민하진 않았다. 한국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추운 정도의 기온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옷 중 사진을 찍었을 때 선명한 인상을 주겠다 싶은 옷들을 골라 캐리어에 담으면 되었다. 그렇지만 동남아는 완전히 생소하다. 그곳의 기후가 어느 정도로 덥거나 습한지 아예 모르기 때문에 뭘 입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나름 유교걸인 나는(그리고 몸매 역시 유교걸일 수밖에 없는 나는) 평소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데, 그곳에선 반바지 정도를 입으면 괜찮으려나? 싶었다, 처음에는.


결혼 전 혼자 떠났던 유럽 여행 중 바르셀로나에서 샀던 아주 짧은 반바지가 있다.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스위스로 넘어가면서 기온이 확 떨어져 더 이상 입지 못 했지만 여행 중반까진 무지 잘 입었던 옷이다. 청의 물 빠짐이 꽤나 자연스러워 맘에 쏙 들었지만 엉덩이 바로 아래까지만 오는 길이 때문에 한국에선 입지 못 하고 10년이 넘도록 옷장에서만 살고 있다. 매년 처분을 고민하지만 바르셀로나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며 한없이 자유로웠던 내가 그리워 차마 버리질 못 하였는데 드디어 다시 입어보는구나, 감회에 젖어들기도 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이럴 때의 문제는 보여주기식 후기를 보며 차츰차츰 흐려지는 판단력이라고,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긴 하다. 무언가를 시작할  검색을  많이 하는 편인데, 사실 검색이 가능한 후기는 보여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어 다소 과장된 것들이 많다. 그걸 알면서도 번번이 낚이는(?)것이 문제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그러하듯 이번에도 꼼짝없이 낚여있는 중이다. 보라카이 여행 옷차림, 보라카이 여행 사진, 필리핀 여행 복장 등을 초록 검색창에 자주 입력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온통 핫걸 투성이다. 핫하다는 말은 평소 내가 거의 쓰지 않는 말이며 딱히 좋아하는 말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 후기를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런... 핫하구먼. 핫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내가 가진   가장 핫한(그러나, 옷장 안에서 꼬박 12년을 묵은) 반바지는 저런 핫걸들의 패션 사이에선 매우 촌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마흔 중반의 아줌마가  촌스러우면 어떠냐 싶긴 하지만, 사실 마냥 그렇게 촌스럽고 싶지만은 않다.


내 평생 처음 가보는 동남아고 우리 가족 첫 해외여행이다. 평소엔 잘 찍지 않는 사진도 이번만큼은 열심히 찍어볼 생각인데, 그럴듯한 사진 한장 남기고 싶다. 가끔 신혼여행 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머, 나 이때만 해도 꽤 어리고 예뻤네?' 라며 혼자 흐뭇해하는 것처럼, 60살 즈음에 보라카이 여행 사진을 보면서 '어머, 나 이때만 해도 머리숱도 그럭저럭 봐 줄만 했고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라며 피식거리고 싶다. 아니, 다 떠나서 날이 더울 테니 옷을 수시로 갈아입어야 할 텐데 리조트 런드리 서비스는 비싸니까 차라리 옷을 좀 사야 하지 않을까. 혼자 이런 저런 핑계를 늘어놓으며 검색창에 비치웨어를 두드린다.

 

그렇지, 그렇지. 어깨가 이 정도는 드러나야 하고 크롭티도 입어줘야지. 한번 정도는 등이 훅 파인 원피스도 입어야겠고, 아 맞다! 치마도 바람에 좀 날려줘야지. 아이고, 챙 넓은 모자를 써야 얼굴이 안 타겠구나.


유명한 여행 유튜브 빠니보틀은 항상 현지에서 옷을 사 입곤 한다기에 보라카이 쇼핑몰(디몰 등)도 검색해 봤는데 입을만한 건 한국보다 비싸니 그냥 한국에서 사 오세요,라는 의견이 많았다. 유명 관광지가 그러하듯 보라카이 역시 생각보단 가성비를 따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블로그를 검색하며 열심히 시장 조사 중인데 산미구엘 빼곤 뭔가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싼 정도이다) 디몰의 옷들이 예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인터넷 쇼핑몰보다 비싼 느낌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샀던 반바지가 인생 반바지로 남은 것처럼 그곳에서 산 옷들이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 일단은 현지에서의 쇼핑도 계획하고 있지만, 더운 나라 여행에 적당한 옷이 워낙에 없어서 한동안은 쇼핑몰 사이트를 열심히 돌아다닐 것 같다.

12년 묵은 내 반바지 위에 어울리는 크롭티도 사야 하고, 쨍한 형광색 옷도 하나 사야 하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도 사야 하고. 참! 남편이랑 아들 옷도 사야 하네? 우리, 같이 여행 가지?


이래저래 나 혼자 아주 바쁜 요즘이다.


주말에 주문한 원피스. 이 쇼핑몰의 모델이 너무 예뻐서 자꾸만 장바구니에 뭔가를 담고 있다.

# 사진 출처 비키니 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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