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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30. 2023

보라카이에서 누린 호사

이 여행을 기록하는 내내 난생 처음이라는 고백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 이제는 조금 식상하지만 마사지 또한 그러하다.

동남아는 1일 1 마사지라기에 검색을 꽤 꼼꼼하게 했었다. 원래 가성비 여행을 지향했던 터라 '가성비 스파, 가성비 마사지, 저렴이 마사지' 등의 검색어를 활용하여 몇 군데 선택해 놓았는데 결국 시간이나 동선이 맞지 않아 가지는 못 했다. 다음번 여행 때는 꼭 가야지 하며 여전히 고려하고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실제로 찾았던 곳은 '내돈내산'의 검색어를 활용하여(내돈내산만큼은 여전히 믿음직한 검색어라고 생각한다) 고른 곳 중에서 여행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거나 투어 상품과 연계되어 일정과 동선이 이어지는 곳들이었다.

헬로스파, 마리스스파, 헬리오스스파, 보라스파


그중 헬로스파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우리 가족의 원픽으로 '거긴 다음에도 무조건이쥐~~' 했던 곳이니까.

헬로스파는 가성비 마사지로 검색했을 때도 많이 등장했고 내돈내산 마사지로 검색했을 때도 많이 등장했던 곳인데 사실 처음에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던 곳이다. 핑크핑크하고 소녀소녀 같은 분위기였는데 뭔가 너무 요란하게 예쁘장한 곳이라 그저 인스타용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 같았다. 인스타를 하지 않는 아줌마의 시선으로 보기엔 커피 맛이랑은 관계없이 풍경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해변 근처의 카페 같았달까? 도무지 마사지를 잘하는 곳 같지 않아 가장 먼저 후보지에서 탈락시켰던 곳이다.

얘는 예뻐서 땡!

그런데 그 예쁜 애가 여행 후기에 너무 자주 등장하는 거였다. 다들 내돈내산, 다음 날 또 갔어요, 하고 있길래 줏대 있는 척하고 싶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팔랑거리는 나답게 예쁜 애한테 슬쩍 말을 걸고 만다.

'예약하고 싶은...데요... 성인 2명, 어린이 1명'


보라카이에 도착한 첫날. 그곳을 찾았다.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서 점심 먹고 마사지받고 가면 딱이겠다 싶었다.

사실 그곳을 예약을 한 후로도 내내 조금 미심쩍어서(예쁘고 잘 생긴 애들한테 의심 많은 편) 여차하면 취소할 요량으로 계속 후기를 검색했다. 그러다 사장님들이(4명이다. 쌍둥이 자매와 그들의 남자친구들) 운영하는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을 알게 되었고 맛집 소개나 좀 볼까 하며 살펴보았다. 코로나19로 인해 보라카이가 폐쇄되었을 때 개설된 채널 같았다. 중간에 업자가 잠적하여 예상보다 길어졌던 인테리어 공사를 끝내고 으쌰으쌰 해가며 가게를 오픈했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몇 달 후 코로나로 섬이 폐쇄되고 만다. '보라카이 생존기'라는 채널 이름답게 2년이 넘는 그 시간들을 버텨낸 이야기들이 주로 담겨 있다. 처음엔 그저 현지 교민이 추천하는 로컬 식당과 가성비 리조트를 좀 볼까 싶었던 건데 생존기라는 카테고리의 영상들이 꽤나 진지하고 진솔했다.

갑작스레 유령도시가 된 보라카이엔 관광객의 발이 끊긴 휴양지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로나 19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정책에 따라 아마도 몇 번이고 가게를 열고 닫았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많게는 여덟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직원들 또한 일자리를 잃게 되고 수입이 끊긴다. 쌓여가는 적자 앞에서 월세만이라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장님의 중얼거림이 들리기도 했다.

어느 날 젊은 사장님은 직원들이 대체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생선반찬(... 그게 뭔진 모르겠는데 보면서 아, 저걸...? 하며 깜짝 놀랐다)을 먹는 걸 보고선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다 주기도 한다. 먹을 것을 사라고 돈을 줘도 가족들한테 다 줘버리고 본인들은 또 저렇게 맨밥을 먹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이런 내용들의 영상이 무겁거나 어둡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고 담담했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으며 그저 다시 비행기가 뜨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누군가를 함부로 동정하지도 않았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서로의 삶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화이트비치가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길 기다리며 했던 말은 그저 이츠 오케이, 였다.


인적이 끊기고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은 거리에서 미소를 보이며 외쳤던 오케이는 뜻밖의 울림을 주었다. 영상 몇 편을 내리 보다가 이상하게 눈물이 났는데 그 눈물조차 너무 일방의 감정인 듯하여 얼른 닦아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관광객을 기다려왔고 나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관광객이니, 내 몸을 얼마나 소중하게 만져줄까, 우리 가족은 어떤 호사를 누리게 될까, 기대되기 시작했다.     

 

내가 갔을 때 유튜브 속에 주로 등장했던 사장님 커플(아마도 쌍둥이 자매 중 동생네 커플?)은 없었다. 그들은 그 옆의 헬로풋스파를 운영하는 거 같았고, 언니 커플이 헬로스파를 지키고 있었다. 섬이 닫혔을 때부터 내내 함께 했던 직원인 젬마를 보고 싶었는데 들어가서 휘리릭 살펴봐도 그분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손님을 마사지 중인가 싶었지만 묻진 않았다. (너무 스토커 같잖아!!)


사장님은 우리에게 마사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친절하고 상세하게 안내해 줬고 중점적으로 마사지받고 싶은 부위가 어디인지, 특별히 불편하거나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세심하게 체크한 후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핑크빛 조명 아래에서 핑크색 가운을 입고 여전히 적응하기 조금 힘든 핑크핑크 침대에 엎드려 있으려니 잠시 후 마사지가 시작되었다. 강하고 단단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 누구도 내 몸을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만져주진 못 할 것 같았다.

유튜브 채널 속의 그들과 지금 내 몸을 만져주고 있는 그들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언가 차분해지면서 깊은숨이 쉬어졌다.

온전히 그 손길에 집중하며 나를 맡긴 시간이었다. 마사지를 받는 두 시간 동안 과연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어 나를 돌아보기도 했으며 몇 년 간 꽤나 바쁘게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떠올라 슬그머니 코끝이 찡해오기도 했었다.

성실함과 정성을 가득 담아 나를 꽉꽉 눌러주었던 그들에게도 고마웠고 이런 시간을 가지기 위해 애써왔던 스스로에게도 많이 고마웠다. 우리 모두 참으로 애쓴 시간들이었다.

엎드려 있는 내내 앞으로도 열심히 버텨내야지, 가끔씩은 나한테 이 정도는 해주고 살아야지, 생각했다.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교민들이 운영하는 스파만 갔다. 로컬 스파보단 훨씬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듯했고 한국말로 설명을 들을 후 내 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모두 너무 만족스러웠으며 특히 헬로스파는 다음에도 또 가자며 가족들 모두 엄지척을 했던 곳이다. 다만, 다음엔 로컬 스파도 가보자, 하는 중이다.

디몰과 해변을 지나가다 보면 끊임없이 귀를 뚫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언뉘, 마사쥐?", "마사쥐, 졸라 잘해"

아들은 그 '마사지 졸라 잘해'에 완전히 꽂혀서 들을 때마다 키득거리며 저기 가 보자, 했었고 남편도 어디가 그렇게까지 졸라 잘한다는 거지? 궁금해했다. 나는 아들이 '졸라'에 꽂혀버려 돌아간 후 일상에서도 사용할까 걱정되어 내내 못 들은 척했지만 사실 궁금하긴 했다. 졸라 잘해가 대체 어디지? 얼마나 잘할까? 그러니, 담에는 못 이기는 척 그 졸라 잘해를 따라가 볼 작정이다.


내가 있는 동안은 비수기여서 직항이 티웨이 항공뿐이었지만 12월 중순 이후로 다시 몇 군데 노선이 추가된 걸로 알고 있다.

보라카이로 가는 하늘이 또 그렇게 어이없는 일로 기약 없이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있는 내내 아주 간절하게 바랐다. 그들은 이츠 오케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그곳을 향해 마음이 많이 기울어진 나는 진실로 그들의 이츠 오케이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그곳에서 내가 누렸던 모든 호사들. 다정한 손길들과 괜찮냐고 몇 번이고 확인해 주던 속삭임들. 진심으로 많이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가득 담아 오늘도 이츠오케이 하길 바란다.

헬로스파. 깜짝 놀랄 정도로 핑크 세상이다.
핑크 조명 아래의 핑크 침대
헬로스파 사장님 커플. 블로그랑 유튜브에서 종종 봐서 그런지 꼭 연예인 본 느낌이었다.

+ 마사지가 끝나고 너무 만족스러워서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 했더니 나를 찍어달라는 이야기인 줄 알고 "아 그럼요! 찍어드리죠."라고 대답하며 나와 남편을 찍어주려 하셨다.

", 그게 아니고 사장님 커플이요" 했더니 깜짝 놀라다가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해주셨다.

아주 큰 호사를 누리고 갑니다, 담에 또 올게요, 인사하고 나왔다. 담엔 헬로풋스파도 방문할 계획이다.


+ 내가 갔던 곳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마리스 스파는 페어웨이즈 리조트의 해변에 있는데 바다 쪽으로 큰 창이 있고 그곳에서 따끈한 반신욕을 즐기다가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엄청 고오오급스러운 곳이네, 엄마?" 하며 아들이 깜짝 놀랐던 곳.


헬리오스 스파는 남편과 나만 갔다.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 아들에겐 선번과 함께 이른 사춘기가 찾아왔었고 한 이틀 정도 모든 일정을 거부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숙소에 두고 갔다. (벌써 돈을 지불했다고ㅜㅜ, 제발 가즈아, 라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마사지 해주시던 분이 발을 만지시다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남편과 내 손을 잡은 채 손등을 자신들의 이마로 가져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좀 많이 놀랐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그건 그들의 전통 인사였던 것 같은데 그땐 알지 못했으며 그저 느닷없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손등을 이마에 가져가기에 너무 당황했었다. 남편과 마주보며 "아니... 왜 이렇게까지..." 했었다.

마사지에 집중하지 못 한 채 나도 똑같이 인사해 줘야지, 언제 해야 할까, 그것만 생각했던 것 같다.

끝나고 나오는 길에 마침 적절하다 싶은 타이밍이 생겨 나를 마사지해 주신 분의 손을 잡고 손등을 내 이마로 가져가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이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만졌구나, 싶어 뭉클거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땐 당황하지 않은 채 나도 정성을 담아 같이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라스파는 나의 승모근과 거의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내 승모근을 꼭 없애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어깨가 많이 굳어있는 편인데 나보다 훨씬 체격이 작으신 분께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내 승모근과 한판 승부를 벌이셨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된다, 너무 애쓰지 마시라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끝내 말리지 못했다. 거기서 나올 때쯤엔 거의 신생아 같은 어깨가 되어 있었는데 돌아와서 또 열심히(정말?)일하다 보니 다시 뻣뻣해져 있다. 승모근 부수러 다시 가야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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