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피 삼촌이라고 불러"
아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활짝 웃던 얼굴이 선명한데 이상하게도 오래전에 알던 사람을 그리워하듯 조금은 아득하고 무언가 아련하다. 아마도 그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제이피에게 투영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제이피는 땡큐보라카이의 직원이다. 우리 가족은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땡큐보라카이에서 예약했기에 우리가 체험을 하는 3일 내내 제이피는 우리를 안내했다. 체험하는 곳으로 데려가고 등록을 도와주며 중간중간 통역도 하고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첫날은 땡보 사무실에서 만나 씨워킹과 제트스키를, 둘째 날은 디몰 버짓마트 앞에서 만나 스쿠버다이빙과 패러세일링을, 셋째 날은 땡보 호핑을 제이피와 함께 했다. 마침 우리가 여행하던 기간엔 한국에서 오는 직항이 티웨이 항공뿐이었고 관광객이 평소보단 적어서였는지 제이피는 우리 가족의 전담 가이드 마냥 늘 같이 했다.
제이피는 웃상이다. 필리핀 사람들이 모두 웃상이긴 하지만 제이피는 유난히 그랬다.
제이피와 만났던 첫날. 아들은 여전히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얼굴이 부어 있었다. 숙소 셔틀에서 마주친 어떤 소년이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기에 아들은 엄청나게 심통이 난 상태였다. 연신 "나는 숙소에만 있을 거라고 했잖아."를 중얼거렸고 그 뾰족함이 최고치를 찍고 있을 때 제이피를 만났다.
"안녕, 제이피 삼촌이라고 불러."
제이피가 인사했지만 아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뭔 소리래?' 하는 표정이 잔뜩 부은 얼굴 위로 스쳤다. 제이피가 무안해할까 봐 남편은 아들의 머리를 누르며 웃었다. 썬번으로 어제는 병원을 다녀왔고 얼굴이 검붉게 부어올라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말만 하는 중이다. 남편과 내가 번갈아 가며 더듬더듬 설명하자 제이피는 웃었다.
"He's just sad." 하더니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괜찮아, 괜찮아" 했다. 제이피는 영어를 잘했지만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해서인지 한국어도 조금씩 하는 것 같았다.
남편과 내가 씨워킹이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바다 안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아들은 제이피와 함께 있었다. "엄마랑 아빠만 해, 나는 안 할 거야." 모든 체험을 거부하며 혼자 있던 아들에게 끝까지 "할 수 있어. 파이팅!"이라 격려했던 이도 제이피였고 바닷물에 닿으면 피부가 따가워서 끝내 물에 들어가지 못했던 아들에게 "괜찮아, 괜찮아" 위로를 건네었던 이도 제이피였다. 제이피 덕분에 남편과 나는 안심하고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아들은 그럭저럭 심심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들이 그랬다. 보라카이에 있는 동안은 엄마보다 제이피 삼촌이 좋았다고.
패러세일링을 하러 가서도 아들은 내내 하기 싫다고만 했다. 바닷물에 빠트리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아들 때문에 남편과 나는 스텝들에게 계속 "노풍덩! 노풍덩!" 이라며 엉터리 영어를 외쳐대었고(... 하아... ;;) 그 모습을 보던 제이피가 그들에게 필리핀어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리곤 아들에게 다가와 물에 안 빠트릴 거니까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덕분에 아들과 같이 하늘 위를 날 수 있었다. 위에서 저 아래 바다를 내려다보니 거북이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손가락을 휘두르며 "저기, 거북이!!" 하며 함께 소리쳤다. 눈앞엔 보라카이 섬이 한눈에 다 보였고 발아래엔 바다가 반짝이고 있어 황홀했다.
호핑 하는 날은 제이피와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굿모닝 제이피!"
화이트비치에 도착하자 저 멀리에 제이피가 보였다. 와다다다 달려가 인사를 건네자 제이피도 함께 웃었다.
도착한 첫날에도, 아들이 아프기 시작하며 약국에 가서 증상을 설명할 때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아 병원까지 찾아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증상을 설명할 때만 해도, 그곳은 그저 예쁘지만 낯선 곳이었는데 그날 아침 그렇게 제이피를 만나 아침인사를 건네고 있으려니 그곳이 더 이상 낯선 여행지 같지가 않았다. 예쁜데 다정하기까지 한 옆 동네 같았다.
바닷물이 닿으면 여전히 조금 힘들었고 겁이 나던 아들은 호핑 초반까진 물에 들어오지 못했다. 남편과 내가 계속 같이 들어가 보자고 해도 아들은 망설였다. 수영도 못 하면서 흥만 넘치는 애미 애비가 불안했으리라. 우리가 물에서 노는 동안 아들 옆엔 제이피가 있었고, 삼촌이 바로 옆에서 잡아줄 테니 들어가 보자 하던 제이피의 설득으로 아들은 결국 바다에 들어왔다. 제이피가 이끄는 대로 물 위에 둥둥 떠서 물고기도 보았고 물 안에서 도넛을 만들던 제이피의 재주에 놀라 그건 어떻게 하는 거냐 물으며 도넛 만들기를 배우기도 했다. 남편과 아들은 패들보드도 탔고 제이피가 잡아준 복어를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호핑이 끝날 무렵 배 안을 정리하고 있던 제이피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실은 그 전날 선셋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던 내내 떠올랐던 질문이었다.
"보라카이를 사랑하나요?"
나는 일을 할 때면 일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만다. 결국엔 지침과 힘듦만 남아 피하고만 싶어 진다. 매일 같이 물도넛을 만들고 물고기를 몰아와야 하고 가끔은 투정 부리는 아이들과 때로는 불친절할지도 모를 관광객을 상대하다 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라도 싫어질 때가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제 보라카이를 떠올릴 때면 제이피를 함께 떠올리며 그리워할 텐데, 제이피는 우리 때문에 이 바다가 싫어지는 순간이 있는지. 제이피도 보라카이를 사랑할까? 이곳 사람들도 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있을까? 눈물겹게 아름다운 석양을 보는 동안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제이피가 보라카이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내가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 말들을 하기 위해 알고 있는 영어 단어들을 떠올려 이리저리 늘어놓으며 문장을 만들어보았지만 결국 하진 못 했다. 제이피에게 다가가 보라카이를 그리워할 때면 당신을 함께 떠올리면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있는 동안 너무 고마웠다는 인사만 건네었다. 말하는 동안 제이피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제이피는 열심히 일 했다. 제이피와 함께 했던 둘째 날이었나? 체험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선 길에 버짓마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제이피와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며 여기서 뭐 하느냐 물었더니 일을 하는 중이라 했다. 다른 팀의 안내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으로 봐선 스파나 공연 관람 안내를 할 시간이었다.
"제이피 삼촌은 또 일 하네?" 아들이 말했다.
"그러게, 삼촌 돈 많이 벌겠다."라고 대답하며 가만히 제이피를 응원했다.
돌아와서 제이피 사진을 보니 묻지 못했던 그 질문들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을 했느냐, 아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제이피는 4살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카티클란에 살고 있어 제이피는 매일 같이 카티클란과 보라카이를 오고 간다고 했다.(보라카이는 작은 섬이라 공항이 없다. 근처의 칼리보 공항이나 카티클란 공항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후 카티클란 선착장으로 이동하여 작은 배를 타고 보라카이 섬으로 들어와야 한다). 제이피가 늦는 날이면 아내는 아이에게 얼른 자라고 하는데 아이는 제이피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돌아온 제이피에게 안긴다고 했다. 아이를 안을 때면 에너지가 솟는다면서, 나는 아이를 좋아하며 우리 아들도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하는 제이피의 미소가 참 좋았다. 눈동자에 행복이 가득했다.
제이피와 헤어질 때 많이 서운했다. 아들은 제이피를 끌어안았고 나는 내 형편에서 줄 수 있는 가장 큰 팁을 제이피에게 건네며 "이건 당신 딸 거예요."라고 했다. 한국에선 원래 친한 사람의 아이들에게 용돈을 준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하지 못했다. 당신 때문에 보라카이가 더 좋아졌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지만 그것만큼은 제이피가 이미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보라카이를 사랑하느냐 굳이 묻지 않아도 내가 제이피의 표정을 통해 이미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보라카이에서 돌아오기 전날 현지 세탁소에 빨랫감을 모두 맡겨 세탁을 하고 왔다. 돌아온 후 일주일 정도는 집안 곳곳에서 그 특유의 세제 냄새가 났다. "제이피 삼촌 냄새다." 아들이 그 말을 할 때마다 함께 웃었다. 남편은 모든 향에 민감한 편이라 틀림없이 그 진한 향이 싫었을 텐데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에 기안 84가 여행지에서 만났던 포르피가 출연하는 걸 보더니 "제이피도 한국에 놀러 오고 싶을까?"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제이피와 보라카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년에 다시 보라카이를 찾을 계획이다. 가을이 될지 겨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그곳에 가려 한다.
그때 제이피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 함께 또 호핑을 할 수 있을까?
세부 옥택연처럼 보라카이 제이피도 돈을 많이 벌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작은 배를 타고 매일같이 카티클란과 보라카이를 오고 가는 제이피. 물고기도 잘 몰고 다이빙도 잘하고 물도넛도 잘 만드는 제이피. 친절하고 다정하고 영어도 잘하는 제이피.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을 가만히 그려본다.
수영도 배우고 프리다이빙도 배워서 다시 만날 땐 내가 제이피한테 도넛 만들기를 보여줘야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제이피랑 이야기를 많이 해야지, 라는 다짐도 함께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때는 꼭 한마디라도 따갈로그어로 제이피에게 말을 건네야겠다고. 적어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꼭 그리해야겠다고. 살라맛 제이피,라고. 나의 인사에 제이피가 어떤 얼굴로 웃을지 벌써부터 조금 기대된다.
# 사진출처 땡큐보라카이, 우리 가족 휴대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