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호핑을 했던 날 저녁부터 아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붓기 시작했다. 잔뜩 검붉어진 얼굴을 보며 뭔가 이상한데? 싶었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해진 건지 알지 못했다. 음... 얘가 좀 못 생겨진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나 역시 수영복 자국 그대로 시커멓게 다 타버려 원하던 대로(?) 족장 딸의 외모가 되어 있었고 목 뒤와 등, 종아리가 따갑기 시작했기에 아들도 좀 많이 탔나 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다이빙 샵으로 가기 전 선크림을 잔뜩 바르긴 했지만 물에 다 씻기는 제형이었기에 중간중간 선크림을 발라줬야 했으나 깜빡하고 선크림을 숙소에 두고 나왔다. 반나절이 넘도록 쏟아지는 태양을 맨 몸으로 받았던 나와 아들은 홀라당 굽히고 말았다. 결국은 경험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한다. 부산에 살지만 바다에서 놀아본 적이 없었고 동남아 여행도 처음이었다. 타면 뭐 얼마나 타겠어? 그 나라 햇빛이 세면 뭐 얼마나 세겠어? 살짝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다이빙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얼굴이 아프다며 엄청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고 모든 일정을 거부했다. 밥 먹으러 나가기도 싫다, 바다에 가고 싶지도 않다, 수영장도 싫다, 숙소 안에만 있고 싶다고 하며 휴대폰 게임에만 열중했다.
내가 짰던 일정표대로라면 지금 시간엔 숙소 전용 비치에서 놀아야 했다.
오전에 배웠던 스노클링과 다이빙을 연습하며 놀다가 바로 옆에 있는 스파에 가서 마사지를 받으며 피로를 푼 후 저녁을 먹어야지. 숙소 정문에 있는 썬디스 마켓에 가서 꼬치구이를 먹으며 산미구엘을 마시면 딱 좋겠구먼. 룰루! 랄라!
가끔은 내가 세운 계획이 상당히 만족스러워서 뭔가를 하기도 이미 그 계획에 만취되고 만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순간, 그 계획의 취기가 조금이라도 흐려지면 꽤나 약이 오르고 마는데 돈 싫어, 명예 싫어, 따분한 음악 우린 정말 싫어!라고 노래 부르던 악동 DJ DOC처럼 비치 싫어, 마사지 싫어, 따분한 저녁 나는 정말 싫어! 를 외치고 있는 아들을 보니 슬슬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라다이스 코브 비치와 그곳에 있는 마리스 스파와 수영장 때문에 페어웨이즈를 숙소로 선택했던 것인데 무작정 싫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어금니로 말해요'가 시작되고 말았다.
"(어금니 꽉) 너 그냥 비행기 타고 이대로 집에 갈래?"
아프다며 투정 부리는 아들과 일정 중의 하나라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나를 중재하던 남편도 조금씩 지친 기색을 보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남편도 어금니 꽉) 둘 다 그만 좀 해라, 제발. (나를 보며) 애가 아프다잖아. (아들을 보며) 너도 엄마 기분 좀 살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모두 싸우고 있었다.
"이 여행이 우리 여행이 아니라 엄마 여행이야? 아빠랑 나는 엄마 여행을 방해하는 사람이야?"
사실 이건 남편이 나한테 했던 소리고 아들은 아빠를 따라 똑같은 말을 했던 거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숙소에만 있으려던 남편과 아들이 마치 내 여행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이기적인 것도 알겠고 당연히 아들 컨디션도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밖에 나가 모래 위를 걸으며 바다도 보고 싶었고 망고를 와구와구 먹으며 산미구엘도 왕창 마시고 싶었다. 나도 썬번이지만 그럭저럭 괜찮은데? 못 놀 정도는 아닌데? 괜한 투정 아니야? 내심 서운하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날까지 서로를 등지고 침대뷰만 감상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가지고 간 컵라면과 햇반을 먹으며 나는 책을 읽었고 남편은 유튜브를 보다가 심심하면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웠고 아들은 집에서는 하지 못 했던 게임을 실컷 했다. 우리 방 바로 앞 복도에 누워서 낮잠을 자던 강아지가 가장 행복해 보였다.
아들의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미간까지 다 부어올라 영화 아바타의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 얼굴을 보자 그제야 '아, 내가 좀 심했나' 싶었다. 부랴부랴 병원을 검색하여 달려갔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알레르기 같기도 하고 썬번 같기도 한데, 어제 오후부터 얼굴이 부어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날 약국에서 사 먹였던 약을 보여주며 이걸 먹여도 효과가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마침내 몸짓까지 동원하며 진료를 받았다. 의사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기에 남편과는 다시 한 팀이 되어야 했다. 서로 알아들은 단어를 공유하며(진짜 자존심 상하게도, 대체로 남편이 더 많이 알아들었다.)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헐... 언제쯤 가라앉는다고 해? 보라카이에 있는 내내 이러면 어쩌지,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당연히 주사를 거부하며 울먹이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집에 돌아가면 최신 아이폰을 사주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보라카이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까지 남편과 나는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만 있었고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스스호핑(스노클링과 다이빙)뿐이었다. 가고 싶었던 카페도 있었고 검색해 둔 맛집도 많았지만 숙소 바로 앞의 시티몰에서 사 온 컵라면과 졸리비의 스파게티만 먹던 중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속상한 마음은 모두가 똑같았을 것 같다. 이곳까지 와서 숙소에만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그 속상함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지 않았나 싶다.
집에 돌아와 보라카이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남편과 나는 같은 하늘을 보면서도 서로 조금은 다르게 찍고 있었다. 남편이 찍은 하늘과 내가 찍은 하늘이 달랐다.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거대하고 웅장했으며 저물어 가는 해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매 순간 빛깔을 달리하며 출렁이고 있었다. 우리의 휴대폰으로는 그 다채로움의 전부를 담을 수 없었기에 하늘을 조각내어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이런 하늘을 보았구나. 남편의 시선으로 보라카이의 하늘을 다시 바라본다.
남편에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하늘을 보여주려 한 적이 있었던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과 그보다 더 높은 곳에 펼쳐져 있는 우주는 한없이 거대하겠지. 우리는 끝내 그 우주를 다 알지 못할 것이며 티끌보다 작은 조각 하나만 간신히 손에 쥐고 바라보다 생이 끝날 지도 모를 일인데 나란히 서서 같이 바라본 풍경 하나조차 나누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그날의 다툼들이 참 후회된다. 나이가 사십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치졸한 것은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다음에는 꼭 남편이 바라본 하늘을 궁금해하고 내가 본 하늘도 알려줘야지, 결심해 본다. 아! 알레르기 약과 아들의 피부에 맞는 선크림도 꼭 챙기고!!
네 번째 날 아침이 되어서야 남편과 화해를 했다. 아침부터 괜히 일찍 일어나서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서두르고 있었다. 못 이기는 척 함께 조식 먹으러 가는 걸로 화해를 했다. 그리고, 보라카이에 도착한 네 번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디몰과 화이트비치를 제대로 구경하며 걸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