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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Oct 30. 2024

수영을 할 때 하는 생각

어제부터 다시 새벽 수영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한 달 만이었다. 2주 동안은 여행을 가느라 빠졌고, 다녀온 후에는 새벽 기상 습관이 무너져버려 빠졌다.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던 거다. 아침마다 알람이 울릴 때면 수영 가야 하는데, 오늘은 진짜 수영 가고 싶은데, 아... 나 이러다 자리 뺏기는데(나는 초보 레인에서 꽤나 빨리 앞자리를 차지했다)라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 얼른 알람을 꺼버리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주말에 무쇠소녀단(요즘 이것만 보고 또 본다)을 보는데 그녀들이 수영을 하며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한강? 그쯤이야 껌이지!라고 말하듯 팔을 쭉쭉 뻗으며 물 위에서 미끄러지듯 글라이딩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멋졌다. 아이고, 잘하네. 그렇지만, 나도 출연료 주고 수영 코치까지 붙여서 연습시켜 주면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하며 살짝 질투 어린 감탄을 하다가 마치 잊고 있던 것을 불현듯 깨달은 듯 '아... 맞다, 내일은 나도 수영 가야지.' 했다.  


연느님의 선수시절 어록 파티 중 하나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나 또한 알람 소리 듣자마자 그냥 생각 없이 일어나서, 생각 없이 옷을 껴입고, 생각 없이 차키를 챙겨 수영장으로 간 후, 진짜 최고로 생각 없이 물에 풍덩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 만에 갔더니 수영장 행님들이(새벽반엔 나이 드신 어머님들이 많은데 꼭 서로를 행님이라고 부른다. 행님들 이야기는 다음에...) 나를 꽤나 반겨주셨다.

- 그동안 왜 안 왔어?

- 여행 다녀왔어요. 필리..

- 어머? 팬티가 아니네? 난 또 팬티도 안 벗고 씻는 줄 알았네. 깔깔깔.

- 팬티... 아니고 수영복 자국... 여행 가서 좀 타...

내 말이 아직 안 끝났는데 다시 다른 말들을 쏟아내셨다. 팬티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소용없구먼.

이번 달엔 이상하게 사람들이 많이 안 왔다고. 지난주 금요일엔 7명이서 수영을 했는데 선생님이 계속 뺑뺑이를 돌려서 죽을 뻔했다고. 이제 자기가 왔으니 앞자리 서서 좀 하라고.

네네, 근데 이거 팬티 아니... 필리핀에서....

아, 역시 내 말은 듣지 않는군.


어제는 물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 듯(스케이트는 탈 줄 모르지만) 미끄러지며 유난히 글라이딩이 잘 되는 느낌이었다. 고작 25m 레인을 왔다 갔다 하는 거지만 한강을 횡단하는 기분으로 팔을 뻗으며 헤엄쳤다. 아직 그 '물 잡는다'는 느낌이 뭔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이건가? 싶을 때가 있는데 어제가 그랬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수영하기.

굳이 그런 다짐을 하지 않더라도 사실 수영을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기까지 가야지. 음~ 하며 숨을 뱉어내고 파~   재빨리 숨을 마시며 팔을 길게 뻗어야지. 턴 하고 돌아오기 전에 숨을 잔뜩 들이마셔야지.   정도만 가끔 떠올릴  거의 대부분은 아무 생각 하지 않는다. 팔을 교차하여 물을 밀고 다리를 움직여 물을 차며 타이밍맞춰 숨 쉬는 일에만 본능을 기울일 뿐이다.


다만, 어제는 아주 잠시 어떤 생각을 했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던 나를 떠올렸다. 쓰지 않았다기 보단 글이 나한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아 쓰기가 싫었고, 진짜로 아무것도 쓸 수가 없어서 쓰지도 읽지도 않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여행을 다녀온  불쑥 브런치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었고 며칠 동안 퇴근 후엔 잠을 줄여가며 내내 글을 썼다. 내가 느꼈던 감각들이 나를 스쳐가며 흩어지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남겨두고 싶은 조급함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기어이 10편의 글을 써냈을 때 스스로가  대견했다. 처음으로 글을 쓰는 내가 좋아졌던 순간이었던  같다.


그냥 뭐 쓰면 되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쓰면 되네. 진짜로, 속이 다 시원하네. 

음~ 하며 내뱉는 숨과 파~ 하며 들이마시는 숨 사이에서 쓰던 나와 쓰지 않는 나를 생각하다가 다시금 팔을 교차하여 물 위를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집중했다. 어떤 깨달음 같은 없었다.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쓰지 않는 내가 뭐가 다른 지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수영하는 동안 글라이딩이 너무 되었다는 거. 내일부터는 새벽수영을 빼먹지 않고 나올 있겠구나, 하는 어떤 확신 같은 거. 그뿐이었지만 어쩌면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했었다. 


자유형 왕복을 네 번 하고 와서 숨을 몰아 쉬고 있으려니 선생님께서 쉬지 말고 이번엔 자평자접(자유형으로 가고 평영으로 온 다음 자유형으로 다시 가고 접영으로 돌아오기)을 두 번씩 하라고 하셨다. 거, 차암, 새벽부터 진짜 드럽게 빡세게 돌리는 구만.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며 팔을 뻗었다. 슝슝~ 물 위를 미끄러지며 달렸다. 생각 같은 거 할 겨를 없이 숨 쉬는 타이밍과 팔 뻗는 타이밍에만 집중을 한다. 

어쩌면 글을 이렇게 써 보아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언뜻 하다가 다시금 물살을 갈랐다. 

글이 쓰고 싶다면, 딴생각할 겨를 없이 그저 자평자접 하는 마음. 딱 그 마음으로 글자 한 톨씩, 한 톨씩 써보아도 좋을 일이다. 유난히 글라이딩이 잘 되는 날이 있듯 유난히 내 마음을 꼭 닮은 글이 써지는 날도 있을 테지. 


우선은 내일도 아무 생각 말고 무사히 기상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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