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캠핑을 다녀왔다.
마지막 캠핑이 작년 10월이었으니 거의 1년 만에 간 캠핑이었다. 겨울엔 추워서, 봄엔 꽃가루가 날려서, 여름엔 더워서, 가을엔 여름나라로 여행을 가느라, 실은 다 핑계고 그냥 귀찮아서, 텐트를 펼쳐보지 못했다.
일 년 내내 창고 구석에서...... 가, 아니구나. 고작 구석 정도만 내어준 채 창고 '저~~ 어~~ 언~~ 체'를 다 차지하고 있는 텐트가 못내 거슬리던 중이었다. 남편이 캠핑을 하겠다고 할 때 조금 더 고민했어야 했다. 우리 남편은 체력이 좋지 않고 게으른 사람이라 캠핑을 좋아할지 언정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을 못 한다. 휴우... 저 장비를 살 돈이면 보라카이 여행을 다녀오고도 남았겠다, 생각하니 몹시도 아까웠다. 일 년 내내 창고에만 처박혀 있는 보라카이라니.
딱 3번만 사용했으니 지금이라도 당근에 내놓으면 반값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창고 문을 활짝 열고 텐트를 노려봤는데 아무리 봐도 너무 멀쩡했다. 확실히, 반값만 받는 건 너무 손해잖아?! 게다가 그 반값조차도 못 받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본전을 뽑아보는 건? 캠핑 장비에 300만 원은 훨씬 넘게 썼으니 1박에 30만 원이라 치고 10박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삼십 곱하기 십은 삼백. 아주 멍해 빠진 눈빛으로 구구단 3단을 떠올리다가 생각을 바꿔 캠핑을 조금 더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고 소중한 본전을 위해 우선은 소파에 눌어붙은 남편을 작동시켜야 했는데, 그 정도쯤은 당근보단 훨씬 쉬운 일이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캠핑을 한 번이라도 다녀와야 하지 않겠어? 이번에 안 가면 올해 캠핑은 이대로 끝일 걸? 혹시 창고 통째로 당근에 내놓을 생각인 거야?
미간을 좁힌 채 슬쩍 잔소리를 했더니 남편이 미세한 위험 신호를 감지했는지 눈치를 살피며 움직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부스럭거리더니 캠핑장을 예약하고 장비를 챙긴 후 차 시동을 걸고 합천 캠핑장으로 출동!!
굿.
텐트에 곰팡이가 피었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깨끗했다. 작년 이맘때 텐트 위를 스친 가을의 흔적들로 마른 낙엽들이 조금 흩어져 있을 뿐 아주 말끔한 상태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텐트부터 쳐야 해서 바삐 움직였다. 집 짓기가 끝나자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깨끗하고 맑은 하늘과 그 하늘을 품은 채 이어져 있는 호수가 근사했다. 이틀 동안 우리 집 앞마당이 될 곳이었다. 뜻밖의 풍경에 조금씩 설레었다. 역시 10박은 해 볼 일이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치이익- 소리를 내어 맥주캔을 땄다. 맥주맛보단 이 소리가 좋아 맥주를 마시는 거 같기도 하다. 목을 뒤로 꺾어 맥주를 들이켰다. 오늘이 일곱밤째니까 삼칠이십일. 이백십만 원이구먼. 엉터리 셈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니 초저녁부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역시 이 맛에 캠핑을 하나 봐." 중얼거렸더니 남편이 피식 웃었다.
캠핑장에 올 땐 책을 두어 권 정도 챙기는데 이번엔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을 가방에 넣어왔다.
보라카이에서부터 읽던 책이다. 제목 그대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 읽다 보면 너무 공허해져 여행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아, 이건 좀 슬프잖아? 도저히 이런 분위기에선 읽을 수가 없는데? 하며 금방 덮어버리고 만다. 그러다 보니 꽤나 더디게 읽히고 있는 중이라 내내 가방에 쑤셔 넣어진 상태로 이곳저곳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매일 저녁. 같은 식당을 찾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를 먹으며 같은 맥주를 마시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틈에 무언가가 이미 사라진, 혹은 사라져 가는 어떤 순간들을. 일상의 반복 속에서 불쑥 두드려지는 그 '문득'의 느닷없음이 조금 슬픈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는 '무언가'는 때때로 젊음이었다가, 사랑이었다가, 행복이었다가, 웃음이었다가, 또 가끔은 어떤 안온함 같은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존재하고 있어 미처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이 이미 사라져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존재를 깨닫는 순간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밀려든다.
"삼칠이십일"이라고 중얼거리며 잔뜩 흥에 겨워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 책 속에 숨어 있는 '문득'때문에 또 서늘해지고 말았다. 에잇! 하며 맥주를 더 콸콸콸 마셨다.(콸콸콸이라고 표현할 때면 내가 대단한 술고래같이 느껴져 조금 재밌는데, 실은 술을 잘 못하면서 성격만 급한 탓에 그저 빠르게 꽐라가 되어가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삼칠이십일'과 '문득'
일상이 반복되는 나른함과 끊임없이 두드려지는 계산기 소리 사이로 사라진 것들과 사라져 가는 순간들이 스쳐간다. 내게도 이미 꽤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갔구나 싶었다. 예전엔 나도 낭만만을 쫓기도 했으며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을 끊임없이 계산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나는 어딘가로 가버렸고 가성비와 본전을 따지는 억척스러운 나만 남았다. 나는 가끔 내가 느끼고 있는 감각들이 가성비에 근거한 자기 최면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어찌 붙잡아야 할지, 아니 굳이 붙잡아서 옆에 두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떠한 내가 되고 싶은 걸까.
삼칠이십일을 외다가 문득 느껴지는 서늘함의 정체가 무언지 진짜로 잘 모르겠다.
도시에 있을 땐 예년보다 따스한 기온 탓에 가을인가? 했는데 외곽에 있는 캠핑장은 이미 만추였다. 짙어진 가을이 꽤 맘에 들어 맥주를 꿀꺽꿀꺽 삼켰다. 평소보다 많이 마셨지만 밖이라 그런지 평소만큼 취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앗, 우리 텐트랑 화장실이 좀 멀었던 거 같은데,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지만 이미 맥주를 많이 마신 뒤였다.
잠들었다가 요의를 느껴 잠에서 깼지만 밤의 어둠을 뚫고 화장실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꾸역꾸역 참아가며 딴생각을 하려 했다.
인류가 언제부터 집 밖에 배설을 했던 걸까.
그러다 또 언제부터 오수관을 설치하고 집 안에서 깔끔하게 배설하기 시작한 걸까.
어릴 때 외할머니집에 가면 방에 요강이 있었다. 할머닌 자다 깨서 화장실 가기 무서울 때면 요강을 쓰라고 했는데 뭔가 부끄러워 제대로 쓰질 못했다. 문득 그 요강이 떠올랐다. 우리 텐트는 전실이 있으니까 다음에는 요강을 들고 올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그건 너무 원시인 같으려나, 갸웃거리다가, 요즘 요강을 파는 곳이 있긴 한가, 궁금해하다가, 아니, 화장실이 이렇게나 불편한데 1박에 30만 원은 너무 과한 건가, 야무진 척을 하다가, 드디어 옆에서 자던 남편이 뒤척이며 일어나기에 얼른 따라나섰다.
뭐야? 안 잤어?
응, 화장실 가고 싶어서 아까부터 깨어 있었어.
그냥 가면 되잖아.
그냥 그렇게 가기엔 무섭잖아. 게다가 화장실이 꽤 멀다고.
텐트 밖을 나서면서 남편을 팔을 붙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남편이 갑자기 멈춰 섰고, 왜?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하늘을 보는 남편을 따라 나도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예쁘다는 느낌보단 너무나도 명확한 존재감에 깜짝 놀랐던 거 같다. 별이 너무 많았고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나 이렇게 별이 많은 거 처음 봐.
저게 북극성인가 보다. 별이 코앞에 있네.
한참을 그렇게 남편의 팔에 내 팔을 끼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다. 비현실적으로 밝고 촘촘한 빛이라 하늘이 원래 이렇게 쫌... 약간 점박이 같은가?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다 불쑥 요강이 없으니 별도 보구나, 싶어 다음에도 요강 없이 캠핑 와야지,라는 다짐도 했다. 남편과 이 시간에 함께 하늘을 보며 별을 헤아렸던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별을 보는구나. 다시 또 별을 보는구나.
화장실이 잘 갖춰진 집안에 있을 땐 그 편안함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캠핑을 할 때면 그 당연함이 엄청나게 큰 편의와 안온함으로 느껴진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행복과 평화인 것이다.
문득 느껴지는 서늘함을 깨닫기 전에 좀 더 자주 팔짱을 끼며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매번 '삼칠이십일'을 열심히 중얼거리며 비록 엉터리일지라도 진지하게 셈을 할 테고, 오늘도 내일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내가 본 손해와 이득을 따질 테지만, 문득 밀려드는 사라진 것들의 부재에 너무 많이 서늘해지지 않도록 가끔은 조금 불편하고 가끔은 덜 억척스러워보자고, 우연히 올려다본 촘촘한 하늘과 밝은 별빛에 기대어 스리슬쩍 낭만에 젖은 척해본다.
우선은 10박을 해 보자고 다짐했다. 이제 2박이 남았지만 아마도 몇 박쯤은 더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캠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