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 배부를 줄 알았다

화려한 아니 조촐 아니 초라한 시작

by 재재형제맘

살면서 이렇게 취업 준비를 심히 간절히 원해서 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젊었고 혈기 왕성했고 자신감 넘쳤고 경력은

이 분야에서 저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기회는

나에게 왔고 어디서든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이젠 모두 전생 같이 아련한 시절이다.


물론, 분명 그 당시에도

한 순간도 허투루 쓴 적이 없었을 것이다.

6시간 이상 자면 큰일 나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제발 6시간 이상 푹 자봤으면 좋겠다.


내 인생의 처음으로 3년 동안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육아에만 집중하던 시기였다.

작은애한테 미안할 정도로 큰애한테 집중하던 때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둘째가 질투와 설움 폭발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

이 시간을 큰애한테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큰애는 학교 적응이 더욱 힘들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책도 읽고 독서 모임도 나가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고..

사실, 영어란 영어는 다 내 머릿속에 넣겠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맘이 편했다.

그래도 아침마다 EBS 프로그램을 틀어놓으며 아이들을 깨우고

EBS 영어 방송과 AFKN 라디오는 항상 틀어 놓고 흘려듣기만 했다.


그리고 다른 통번역사들도 공감을 하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국어에 목말라 있었다.

영어보다 국어에 집중하는 번역가라니...

아이러니하지만 모국어가 탄탄해야 외국어도 잘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또한, 번역은 또 하나의 창작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책도 읽고 싶은 한글 책만 골라 읽었다.

번역서 아닌 한국어 저자 책만 골라서 고전부터 현대 소설, 에세이, 어린이 동화 등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예전에 손과 눈에서 떼지 않았던 신문과 일간지 같은 딱딱한 글에는 왜인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맘에 드는 글은 필사도 하고

1, 2학년이 읽어야 할 예쁜 동시집을

아이 주려고 샀지만

시가 너무 예뻐서 내가 필사하고 있고...


언어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하고 있었다.


집을 팔아야 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절실함으로 이러한 모든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이력서 한/영, 포트 폴리오 한/영, 커버레터 한/영

이렇게 다듬고 내 이력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아직 초등 저학년인 아이들이기에

재택근무로만 알아보는데....


흠... 그런데 내가 시대에 뒤처진 걸까?


그동안 번역 시장은 CAT툴 사용여부와 기계번역(Machine Translation, MT)을 선호하고 있고

MTPE(Machine Translation Post Editing) 스킬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 이력을 보고 연락을 했으나 CAT 툴 사용 여부를 물어보고는

트레이닝을 제공하지 않으니 계약을 고사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MTPE 포지션을 구하는 공고들도 허다했다.


쉬운 게 없구나...

이력서만 다듬고 지원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이도 있고, 시대에 뒤처져 툴 사용도 못하니

내가 매력적인 지원자가 아닐 수밖에...


단가 후려치기를 하며 다가오는 해외 에이젼시 때문에

잠시나마 내가 그래도 괜찮은 후보감이구나 착각을 했던 거였나?

화려한 재시작인 줄 알았는데...

조촐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시작이다....

여기저기서 오는 불합격 소식...

애초에 내 분야가 아닌 분야를 지원한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씁쓸했다...


하지만, 한참 잘 나갈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이제 나이도 들었고...

게다가 이력서를 보면 3년의 공백기가 고스란히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내 분야가 아닌 의학, 임상 쪽을 지원했으니 다른 지원자들과 차이가 났을 수밖에...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래 본다...


작아도, 초라해 보여도, 이게 나의 재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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