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지붕 B사감 Apr 10. 2024

프로 장롱 면허 마스터

치사하고 비겁하게도 노인보다 쉽다고 생각한 대상을 찾아 취업을 시도했다. 그래서 알량하게 떠올린 대상이 아동, 청소년, 여성이었다. 초심자에게 행운이 있다고 했던가? 서류를 접수하자마자 면접이 잡혔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기관이었는데 구체적인 사업 내용을 들어보니 토요일 근무가 필수였다. 배부르고 안일한 생각이지만 ‘워라밸’의 꿈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말이라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가족 회합의 시간을 놓치면서까지 취업을 결정할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토요일 근무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채용이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출산과 육아로 한차례 퇴사한 이후 비교적 쉽게 재취업에 성공했던 것을 기억해 내고 은근히 자만했고 기대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로 목이 타게 기다려도 면접의 기회조차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무심히 채용 사이트를 클릭하면서 둘러보다가 ‘입사 지원 현황’을 우연히 발견했다. 워크넷에서 제공하는 이 데이터는 지원한 기관의 지원자 현황을 보여주며 이 자료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지원자들을 성별, 나이, 학력, 경력 등으로 세분하여 ‘당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적나라한 통계 자료에 세상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시작해 보기도 전에 아주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친절하고 촘촘하게 알려주는 시스템에 기겁한 것이다.

     

“당신보다 젊은 나이에 석박사 학위까지 있는 가방끈 긴 지원자, 거기에 경력까지 갖춘 인재들이 지원했어요. 면접에도 호출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요?.”  

   

워크넷 시스템은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자료로 제시해서 날 것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비관적인 마음이 되었고 초조해지고 허무해졌지만, 동시에 다시 뭔가 시도해야겠다는 동기도 생겼다. 남들과 구별되는 자격증을 더 취득해 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관성적인 공부 습관이었을까. 주변에서 청소년 관련 자격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친구들의 움직임에도 쉽게 흔들리며 영향을 받았다. 그래, 내친김에 청소년 지도사 자격까지 갖춰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청소년학도 사회복지학과 매우 닮은 과정으로 학점을 취득했다. 사회복지학에서 하나의 부문으로 청소년 복지를 다루었지만 조금 더 면밀하게 파고드는 차이가 있었다. 학점을 취득하면 필기시험이 면제되고 면접을 통해서 자격 여부가 결정되었다. 이번 시험은 면접만으로 진행되므로 모든 과목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기록해 보았다. 핸드폰에 내장된 보이스레코더를 이용해 각 문제에 따른 답변을 녹음하면서 암기해 본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목소리의 크기와 정확도를 시험 삼아 들어보다가 문제은행의 답변을 하나씩 녹음해 두고 그것을 들으면서 집안일을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매일 팟캐스트나 오디오북, 음악 등을 들으면서 집안일을 하는, ‘멀티태스킹’까지는 아니더라도 몸과 머리를 동시에 움직이는 것에 익숙했기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물론 신경 쓰지 않고 흘려들어도 좋을 라디오 방송이나 음악처럼 편한 마음으로 면접을 대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아이들의 영어 흘려듣기처럼 자주 들어서 자연스럽게 입에 붙기를 바랐고 시험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다는 자기 안심의 방도로 충분히 기능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열심히 했다. 비록 시험 대비 교재 한 권에만 공들이면 자격취득에 어려움은 없어 보였지만 시험은 항상 시험의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난이도에 상관없이 긴장되고 초조해지게 만들었고 시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도 그 느낌을 배가시켰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대학생들이 주고받는 말에 귀를 쫑긋하면서 들어보니 준비하지 않았던 생소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시험 관련하여 나누는 내용이 낯설어서 일순 긴장했지만 인제 와서 뭘 어찌하랴 싶은 마음에 금방 덤덤해졌다.  

    

면접장에 족족 도착하는 응시자들은 연령대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중구난방이었다. 아주 어려 보이는 대학생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해 보이는 중년까지, 몇 개의 조로 나뉘어 차례대로 면접장에 입실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대기실에 모여 앉아있었다. 수험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람과 노트에 정리한 내용을 훑어보는 사람, 그저 멍하니 무념무상인 사람이 모여 지루하게 순번을 기다렸다.


빠른 조에 배정되어 면접을 끝낸 사람들의 홀가분한 뒷모습을 부러워했다. 조금은 뒤 조에 편성된 탓에 기다림이 길어졌다. 미련하게 끝까지 챙겨 온 수험서를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잘 외워지지 않아 접어두었던 페이지를 읽고 또 읽어도 헛갈리던 부분은 계속 헛갈리고 머릿속에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덮어두자니 순서는 아직 멀었고 펼쳐두어도 집중은 안 되어서 그냥 흰 종이에 검은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는 꼴이었다.

    

드디어 우리 조가 호명되었다. 체격이 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삐사감은 면접장 앞으로 안내되어 대기했다. 기다리는 동안 작고 낮은 목소리로 서로 응원의 말을 주고받으며 긴장을 풀었다. 면접장에는 면접관 세 명이 앉아있었다. 한 사람당 각각 3~4문제가 주어졌다.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다른 사람의 질문에 나름대로 답변을 만들어 속으로 대답해 보았다. 학생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은 법령이나 정확한 사업명을 대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남자 학생이 대답을 잘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삐사감도 한 문제는 삐끗했다. 사업명을 착각하여 다른 내용을 열심히 늘어놓다가 도중에 잘못을 깨달았지만, 기억이 분명하지 않아 동문서답으로 밀고 나가고 말았다. 공부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했다고 피력해 보겠다는 심보로 원하는 만큼 말하고 나왔다. 시험 결과를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 감점이 커서 조금 의아했다. 감점 사유를 알고 싶었지만, 무사히 면접시험을 통과했으니 그걸로 족하기도 했다. 이렇게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도 손에 쥐었다. 이로써 장롱 면허 사총사가 완성되었다.  

   

각종 자격증 시험장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우리 집 방구석에서 취업 준비로 끙끙대고 있는 아이 연배의 응시자들도 있었다. 앞뒤 연번으로 앉은 탓에 가벼운 대화를 나눈 그들과 훈훈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단체 면접장에서 횡설수설하는 어린 학생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이 되어 안타까워졌다. 그러나 20여 곳에 지원하고도 면접 제의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자니 면접장에서 만난 학생들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떠올랐다. 워크넷 데이터에 수치로만 떠돌아다니던 실력자들이 면접장에서 만난 학생들의 얼굴과 겹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불경기란다. 원서를 내는 족족 자신의 실력을 부정당하며 번번이 위축되는 모든 취업준비생들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길 기원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그들과 본인을 비교하게 되었다. 이런 취업 빙하기에, 그만 은퇴해도 될 나이에, 다시 취업 전선에 나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아무리 같은 학력과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정식으로 대학을 나온, 젊고 더 활기차고 건강한 사람에게 호감이 가지 않을는지.


그래서인지 수십 개의 지원서는 공중 분해된 듯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이전 04화 언제까지 진로 탐색만 하고 있을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