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뜨개질을 시작한다. 2.5호 뜨개바늘은 처음 써보았다. 너무 가느다래서 손에 잘 잡히지 않고 힘을 좀 세게 쥐면 부러질 듯하다. 다섯 개의 가닥이 하나로 묶인 주황색 실뭉치는 구름 많은 흐린 하늘과는 달리 쨍하게 선명하다. 열두 코를 잡아서 시작하다가 코를 늘였다가 줄였다가 마지막엔 끝이 오므려지도록 잡아당겨 긴 타원형을 만든다. 토끼님이 드실 간식을 만드는 중이다.
앗, 힘 조절이 잘못되는 순간 한쪽 바늘에 꽂혀 있던 20분짜리 노동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바늘에서 탈출한 여러 개의 올을 필사적으로 주워 다시 바늘에 안착시킨다. 잠깐 기분 전환으로 시작한 토끼 간식 만들기로 어느덧 밤을 맞이했다. 그렇게 시간을 잊고 달려 완성한 당근 두 개가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다.
뜨개질 교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바늘에 걸린 코에 집중하느라 서로 대화가 없다. 심지어 선생님마저도 콧수를 세어가며 도안대로 각자의 토끼를 만드는 수강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어 세상 어디보다도 조용하다. 원래 10시간 동안 토끼 인형 하나를 완성하는 과정인데, 이번 해에는 도서관 지원금이 축소되었는지 7.5시간으로 단축되어 진행되는 바람에 수강생도 선생님도 마음이 급하다. 급한 마음에 손을 놀리다 보니 실수는 더 잦다.
“어, 코가 늘었어요.”
“으악, 코가 다 빠져버렸어요.”
“살리세요, 살릴 수 있어요.”
시간 내내 이런 대화가 오갔다. 살려야 했다. 벌써 꽤 많이 떠내려간 옆 사람을 흘깃 관찰하다가 조바심이 났다. 본래 눈처럼 하얀 색실로 뜨기 시작한 토끼에 점점 손때가 묻어갔다. 실수가 반복된 탓이다. 틀리면 다시 풀어서 완벽한 모양을 만들겠다던 생각은 실수를 덮어버리자는 기류로 바뀌었다. 한 코가 늘면 어디선가 줄여버리고 줄어든 코는 늘려버리는 식으로 원본과 다른 창조적인 도안으로 완성되어 갔다. 이다지도 인형을 조잡하게 만들면서도 손아귀는 아파지고 눈도 께끔해졌다. 하찮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을 하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다시 원초적인 질문이 스친다. 이걸 굳이 왜 만드는 걸까?
다이*에만 가도 보드랍고 예쁘고 깜찍한 표정의 인형으로 가득 채워진 판매대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가격도 너무 저렴해서 갈 때마다 하나씩 사가져 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만지작거리다가도 내려놓는 이유는 나중에 처분할 것을 염려해서이다. 현재 집에 있는 인형은 아이가 어릴 때 이런저런 이유로 만난 것들이다. 아이의 애착보다는 엄마의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인형은 그나마 책꽂이에 자리 잡고 있지만, 덩치가 큰 인형은 창고 선반에 놓여있다.
토끼 인형의 다리에서 몸통을 지나 동그랗고 커다란 얼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콧수를 최대로 늘려야 한다. 갑자기 늘어난 콧수를 감당 못 하고 올을 우수수 빠뜨리면서 아악, 하는 비명이 수강생들 사이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다. 강사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태평하게 응수한다.
“살리세요, 살려야 해요.”
“어휴”
강사의 태연한 대응을 들으며 부지불식간에 단전 깊은 곳에서 한숨이 나왔다. 하릴없이 장롱에 박혀 가끔은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자격증도 살리세요, 살릴 수 있어요, 살려야 해요,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대바늘에서 빠져나온 코는 눈과 손가락을 모두 최대한 집중해서 하나하나 건져내야 한다. ‘으악’ 소리에 민첩하게 반응하며 지원해 준 강사의 빠른 손길 덕에 몸통보다 더 크게 과장된 거대 머리 토끼는 점점 형태를 갖춰갔다. 머리 크기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작고 까만 단추 눈도 달아놓자, 모두가 쳐다보며 ‘귀여워’를 연발하게 하는 외모로 변신했다.
귀엽다. (주황색 작은 소품은 뭐든 귀엽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재밌네. (당근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가 있지, 요런 작은 것에 매달리고 있다는 게 우습다는 건가?)
토끼가 완성되어 가는 중간 과정을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메신저로 알린다. 오늘 한 일 중에 가장 창의적이고 그나마 가슴이 차오르는 과업은 이거 하나뿐이니깐. 그런데 가족의 반응에 마음이 뾰족해진다. 그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일이 성에 차지 않은 까닭이다. 아예 대답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딱히 원했던 답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원했던가. 지상 최대의 상찬을 바랐는지, 아니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런 걸 왜 눈 버려가며 하고 있냐며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길 바랐는지.
나이를 지긋이 먹고 시작한 공부는 나름 꼬리의 꼬리를 문, 서로 깊이 관련된 공부라는 믿음이 있었다. 성급하게 남들과 같아지려는 마음에 쉽게 포기했던 경로를 이제는 제대로 밟아보겠다며 꺾이지 않던 의지도 이쯤에서 접어야 하나 싶은, 아니 이미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원봉사에서 시작한 사회복지학 공부, 거기에서 가지를 뻗어나간 여성학과 청소년학 공부에까지 이르는 행보가 마치 토끼 인형의 눈을 다는 것처럼 속절없이 느껴진 날이었다. 도대체 왜 하는 거냐는, 취미로 공부하는 거냐는 핀잔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내부의 추궁이었다.
작년 여름 예년과 다르게 잎을 쑥쑥 키우던 고무나무를 보면서 드디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내 고무나무는 열심히 키워내던 잎을 거의 떨궜다. 푸르던 잎이 아쉬워 노랗게 변한 부분만 잘라주었더니 다른 부분까지 건강하지 못한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잎 하나가 그렇게 변하더니 무슨 전염병처럼 이웃한 잎들도 안녕을 준비하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미련이 남아서 며칠 동안 바라보다가 가위를 들고 예닐곱 개의 잎을 한꺼번에 정리했다. 여린 새잎이 나올 때마다 대견하다고 칭찬하면서 햇빛이 잘 드는 곳을 향하도록 화분을 이리저리 돌려주던 마음이 떠올라 씁쓸했다.
항상 그렇듯이 식물이 아픈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식집사는 무기력할 뿐이었다. 어느덧 겨울의 끝을 지나가면서 달랑 이파리 두 개만 겨우 부여잡고 있던 고무나무에 새로운 순이 나왔다. 양쪽으로 두 팔 벌린 것처럼 사이좋게 나오는 새순도 반가웠지만, 고무나무의 조금 굵어진 줄기에 예전에 없던 무언가가 눈길을 끌었다. 변색한 잎을 똑똑 잘라주었던 그 자리, 하얀 액체를 흘리며 잎이 잘려 나가던 곳에 동그란 옹이가 생겼다. 그 흔적이 마치 커다란 나무들이 가진 옹이의 축소판 같아서 멋져 보였다.
몇 년간 소득 없이 계속되고 있는 삐사감의 공부도 작은 포트에서 시작한 고무나무처럼 옹이를 가지게 되는 날이 있을까. 멋진 옹이를 가지려면 잎을 떨구는 아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걸까. 모든 사소한 시간과 순간에도 그동안의 시간을 반추하고 있었다. 토끼 인형을 만들어도 식물을 바라보아도 무심하고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는 줄 알았던 감정이 차올랐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위로 힘차게 떠 오르는 찻잎처럼 문득 거세게 떠올랐다. 그만큼 정성을 다한 나날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