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을 피하고 싶어서
길어진 손톱을 잘랐다. 짤막한 손가락은 콩알보다도 작은 손톱을 겨우 달고 있는데 그마저도 항상 짧게 유지해서 더 작고 우스워 보인다. 우쿨렐레를 연주할 때는 왼쪽 손톱은 하얀 초승달 모양을 만들기가 무섭게 잘려 나갔다. 한동안 거치대에 세워져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악기를 다시 들어 올리려면 손톱부터 깎아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한 손가락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손톱을 깎는 것은, 좁은 지판에 걸쳐있는 현을 야물게 눌러 주기 위해 기합을 넣는 것이다. 제아무리 우쿨렐레가 쉬운 악기라 해도 현을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어떤 음도 들려주지 않으니깐.
우쿨렐레를 오랜만에 튕겨본다. 이보다 튕긴다는 행위에 딱 어울리는 악기가 있을까? 아주 험악했던 분위기도 낭창낭창하게 만든다. 온몸에 힘을 빼고 이완하게 만드는 특유의 힘없는 음색이 오늘도 돋보인다. 머릿속에 마구 엉켜있던 실타래를 풀어준다. 가끔은 그냥 싹둑 잘라버린다.
“나중에 생각해, 아님, 그냥 잊어버려.”
그래도 괜찮다고 흐물흐물하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속삭여준다.
물론 몇 개 안 되는 현 위에서도 아르페지오, 스트로크를 오가며 현을 뜯어놓을 기세로 현란하게 속주를 해대는 연주자도 부지기수다. 그들의 손가락 움직임은 자기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지 못해 못내 아쉬워 보인다. 그런 영상을 볼 때면 간략해진 코드와 코드 사이에서도 버벅거리며 멈추는 자신의 연주가 한없이 한심하고 부끄러워져서 한숨을 내쉬며 거치대에 악기를 다시 세워 두기도 한다.
하지만 우쿨렐레 연주의 정수는 느긋함과 나른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타보다 단순하게 생략된 코드와 몇 개의 코드만 머리에 넣으면 한 곡을 완주할 수 있는 매직이 통하는 악기, 같은 코드 진행으로 몇 개의 노래를 커버할 수도 있는 응용력 또한 뛰어난 악기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아는 풍류를 즐기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이 악기의 임무다.
단조롭고 비슷한 코드 진행이 많아서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 곡의 정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무슨 노래인지 도대체 알아차리기 힘들 때도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목을 가다듬고 노래 부를 기회도 생긴다. 노래는 핏대를 세우며 열창하기보다는 우쿨렐레 소리를 죽이지 않는 선에서 흥얼대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쿨렐레 소리와 닮은 힘을 다소 뺀 조화로운 노랫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악기인지!
악기를 품에 안고 유튜브를 탐색한다. 작고 짧은 손가락에 딱 맞는 크기의 지판을 가진 악기가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온다. 오늘은 무슨 곡을 연습할지 검색을 거쳐 몇 개 코드를 머리에 넣고 연주부터 냅다 따라 한다. C- F- Am- G- G7이 몇 번 반복된다. 너무 단조롭다. 벌써 수백 번은 반복했던 코드 진행이다. 흥미가 뚝 떨어진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Bm- Fm- B7- Gm7, 손가락 하나를 쫙 펴서 지판을 전부 덮고 놀고 있는 손가락도 다른 현을 잡아야 완성되는 코드가 등장한다. 정말 연주하고 싶은 노래는 이런 코드 한두 개쯤은 꼭 들어가 있다. 손가락이 플랫 위에서 방황해야 하는 코드가 중간에 섞이니 명랑한 동요 같던 노래가 조금 어른스러워진다. 그럴듯해진다. 단순함에 묘하게 복잡함이 녹아들어 멋져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딜레마. 코드 진행이 너무 쉬우면 몇 번 튕기면서 연습하면 한 곡이 완성되지만, 어려운 복병 코드가 등장하면 노래는 중간에 돌연 멈추고 플랫 위에서 손가락이 헤매기 시작한다. 연주가 이어지지 않는다.
작년 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우쿨렐레를 샀다. 대충 나무와 현을 이어 붙인, 악기라 부르기 힘든 악기를 피해서 초심자에게 맞는 가성비가 좋은 악기를 찾느라 몇 주일이 걸렸다. 근처 주민센터의 강좌는 지역 주민 제한에 걸려 공석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애매하게 세 개의 행정구역이 겹친 지역에 살다 보니 다른 시도의 공공기관이 행정구역상의 기관보다 훨씬 가까워서 항상 관외 신청만이 허락되었다. 혼자 튕겨보기 시작한 연주는 처음이 제일 쉬웠고 갈수록 어려워졌다. 겨우 공석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땐 나름 몇 곡을 연주할 정도로 악기에 익숙해진 한여름이었다.
이미 저만치 진도가 나간 교실에 들어가 적응하느니 독학을 이어가기로 했다. 집안을 오가다 보면 항상 보이는 위치에 우쿨렐레를 세워 두고 가는 길에 한번, 오는 길에 한 번씩 현을 튕겼다. 마음이 내키는 날이면 품에 안고 유튜브에 의지해서 연습했다. 품에 안은 악기마저 덥게 느껴지던 어느 날,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색과 문양의 옷을 샀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을 것 같던 옷을, 그것도 파랑과 빨강으로, 상하 세트로 두 세트를 과감히 질렀다.
빨강도 아주 빨강, 파랑도 아주 파랑인 색과 열대의 꽃이 그려진 실내복이었다. 직접 하와이에 가서 입고 놀아 재꼈다면 좋겠지만 집이 하와이가 된 듯한 기분이라도 내자는 심정이었다. 몸에 붙지 않는 여름 소재 특유의 찰랑찰랑함과 촤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옷감이 더위를 덜어냈다. 그것을 위아래 세트로 완벽하게 갖춰 입고 우쿨렐레를 잡고 튕기면 잠시 유체 이탈을 경험할 수 있었다. 휴양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여기에 찌는 더위는 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빨강을 빨면 파랑을 주워 입고 파랑을 빨면 빨강을 주워 입으면서 더운 여름을 건강하게 났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는 가족들은 너무나도 선연한 옷 색깔에 새삼 놀라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옷을 입고 우쿨렐레를 튕기는 사람을 보면 다시 한번 더 크게 웃었다. 배짱이 같다고 말하면서도 또 웃었다. 하와이안 셔츠 덕분에 이유를 모르는 웃음이 여러 번 우리를 찾아왔다. 그해 여름, 익숙하지 않은 하와이안 셔츠를 지르면서 언제나처럼 반신반의했다.
“어울릴까, 어울리지 않을 거야, 어울릴 리가 없잖아.”
그래도 장바구니에서 결제창까지 넘어가게 한 것은 그 옷의 놀랄만한 가성비 때문이었다. 위아래 세트가 하나의 가격보다도 저렴한 시즌 마감의 잠옷 겸 실내복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상 빛을 못 보게 된 자격증을 품고 한동안 무기력했다. 막연한 불안이 또 찾아왔고 아무런 저의 없이 사람들이 던지는 순수한 말에 괜스레 서운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이를 악물고 초라함을 감추고 싶었다. 우쿨렐레를 산 것은 돌발행동이었다. 평소 삐사감에겐 없는 선택지였다. 파도 소리가 가득한 해변에 앉아서 단순하기 짝이 없는 토핑을 얹은 팥빙수를 먹으며 멍한 눈으로 바닷바람을 쐬던, 그들 옆에 흐르던 우쿨렐레 소리에 반했는지 모르겠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렇게 몽환적인 분위기가 되거나 세상 밖 풍경으로 데려가지는 않았지만, 네 개의 현은 포근한 소리로 불협화음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위로했다.
그해 여름 내내 엉겨 붙지 않고 기분 좋게 피부 위로 시원하게 떨어지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우쿨렐레를 튕겼다. 멀리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흡사 하와이안 같았다. 그 모습에 저절로 세상이 또렷해지고 명랑해졌다. 넘치는 활력으로 한여름 무기력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이끌며 먹고 자고 웃고 떠드는 보통의 소중한 나날을 보내게 했다. 그래서 때로는 무모한 선택도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우연’이 만들어낸 어떤 상황에 순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 우연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하나의 루틴을 만들었고 그런 루틴 덕분에 마음을 조율하는 습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습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예기치 않은 발견과 시도가 마치 아주 오래된 습성처럼 저항감 없이 정착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