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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l 18. 2024

붉게 빛나다

거침없이 거대한

12월, 나름대로 겨울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동네는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하다. 며칠 전부터 호수공원을 끼고 있는 식당 주변의 가로수에는 빈틈없이 붉은 등이 걸렸고 밤에는 붉은빛으로 길을 밝혔다. 따스하게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서늘해진 날씨가 걷기에 딱 좋았다. 아파트 근처 동네 슈퍼 앞 광장에는 봄을 맞이하는 꽃시장(迎春花市)도 열렸다. 허리춤이나 어깨까지 올라올 정도로 크고 금귤이 가득 달린 나무와 여러 종의 울긋불긋한 국화꽃 화분으로 눈이 즐겁다. 황금빛 열매를 맺은 나무나 붉은 꽃을 가게 앞에 장식하거나 선물하면서 한해의 복된 시작을 기원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언제나 카운트다운을 하기 전에 잠들어 버리는 가족이지만 그 해는 달랐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폭발적인 폭죽 소리에 강제 기상한 상태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해변에서 손에 들고 터뜨리는 작고 귀여운 폭죽의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복잡다단한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난 일의 미련을 폭죽으로 시원하게 떨쳐내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사람들이 아니었다.


소심하게 퐁퐁 터지던 폭죽은 밤이 깊어지면서 규모가 달라졌다. 고층에서 바라보니 여기저기에서 폭약이 터지면서 발산하는 빛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신나게 터지다 못해 연발로 밤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진 폭죽은 미친 듯한 굉음을 냈다. 이러다가 말 거라고 하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야의 술자리를 모두 말끔히 정리하고 옆집 개가 목이 쉬도록 짖는 동안에도 폭죽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아파트를 산책하다가 어젯밤 광란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밤새 쏘아 올린 붉은 폭죽의 흔적은 발이 닿는 길목마다 발견되었고 늦은 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잔해의 규모는 어젯밤 굉음만큼 대단했다.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터뜨리는 폭죽이나 불꽃놀이도 아닌데 이렇게나 거대한 폭죽을 터뜨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족족 발견되는 거대 폭죽의 붉디붉은 흔적에 왠지 웃음이 났다. 왜 이렇게 한결같이 크고 왜 이렇게 붉은지, 이곳의 물건은 모든 게 거대하고 붉었다.


봄이지만 여름 더위에 가까워진 5월, 장자제로 여행을 떠났다. 산은 높았고 생전 처음 보는 기암괴석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원시적이고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아무리 산세가 험하고 높다 해도 가는 곳마다 탈 것으로 가득하다. 엘리베이터, 케이블카, 모노레일 등 까마득한 절벽을 쉽고 빠르게 주파할 수 있는 장치를 이용하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진귀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5월 1일, 노동절은 중국의 정식 휴일이고 사람은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모든 탈 것 앞에서 순진하게 줄서기를 하던 한국인은 너무나 능숙하고 능청맞고 거침없이 끼어드는 대륙인들의 수법이 경이롭기만 했다. 낯이 뜨거워지고 뒷골이 쭈뼛해지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는 신통방통한 떳떳함이다. 그래서 이상한 다짐을 하나 하게 되었다. 14억 대륙 사람들이 모두 쉬는 공휴일에는 유명한 관광지에 오지 않겠다는.


친가 아버지가 주로 중국인을 비하할 때 쓰던 ‘떼놈’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칠 정도로 많은 인파에 피곤했지만, 경치는 나무랄 데 없이 장엄하고 웅대했다. 그런 풍경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각종 탈 것을 구비해두고 그것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은 촘촘하게 잔도까지 깔아놓아서 아낌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아무리 험한 산세라도 나이 많은 어르신이 장자제에 몰리는 이유는 여행하기 수월하도록 관광지를 거침없이 조성해 둔 덕분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공연을 볼 수 있다. 공연장은 장자제 그 자체였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자연 경관을 무대로 삼아 낮에 홀리도록 보았던 절경에 화려한 빛을 비추어 공연과 함께 다시 한번 감상하게 한다. 중국의 공연은 언제나 휘황찬란하고 화려하다. 출연자의 의상은 장면마다 새롭고 다양하게 바뀌고 움직임은 힘차다. 무대장치는 드넓은 장자제를 무대로 해도 초라하거나 위축되지 않을 정도로 장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곳의 공연은 거침없이 거대하고 무대는 붉게 빛났다.  


드디어 얇은 긴팔을 꺼낸 11월, 선전에서 가깝다는 온천마을 칭위엔(清远)으로 1박 2일 일정의 여행을 떠났다. 장자제에 갈 때는 비행기를 탔지만, 칭위엔은 공항이 없는 소도시라 차로 이동했다. 차로 이동하며 보이는 풍경이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맨발로 흙을 밟아가면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 긴 막대기 두 개를 땅에 꽂아 만든 빨랫줄에 널려있던 옷가지들, 소로 밭을 가는 모습들이 기록 영화에서나 볼 법했다. 차로 이동하다 보니 장자제를 가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고서야 도착한 곳은 온천마을 길목에 있는 동굴이다. 볼만하다는 추천을 받고 들어가 보았다. 그때까지 칭위원을 어쩌면 중국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들어간 동굴은 한국에서 본 어떤 동굴보다도 거대했다. 도보로 이동하다가 보트를 타고 꽤 오랜 시간 잘 알아듣기 힘든 중국어 설명을 들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앞에 보이는 신기하고 기기묘묘한 동굴 내부를 눈에 담느라 연신 고개를 휙휙 돌려야 했다. 수량이 풍부한 동굴 안을 보트를 타고 다닌 것은 처음인 데다 예상을 깨는 장대함에 놀랐다.  


최근 TV에서 방송되었던 충칭의 훠궈집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상상 이상의 규모라며 놀라워했다. 영토의 크기나 인구수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중국은 절대적으로 거대한 국가이지만 숫자로만 인식하는 것과 직접 목도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오감이 전부 열리면서 한꺼번에 여러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것들을 무방비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보이는 것 대부분이 거대했으며 사람들은 거침없이 활기찼고 붉게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거대한 붉은 기운은 어디를 가나 함께 했다.


공산국가의 붉은 색, 붉은 이리, 빨갱이. 붉은색에 대한 두려움, 적대감은 어려서부터 줄곧 지배해왔다. 그러니 중국이라는 강력한 공산국가에 호의를 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 붉은색 안에 담긴 여러 의미 중에 서로에게 복을 기원하는 마음만을 골라서 보는 힘이 생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욕구와 자아를 드러내며 살고 있을 뿐이며 그 모습은 우리랑 너무 닮아서 별세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가 잠시 머물 때와 달리 지금 중국은 더 많이 딱딱해지고 세상을 등지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무섭고 두려운 붉은 색만 부각되는 지금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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