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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Jul 25. 2024

이웃하다

사람 그리고  동식물과 사귀기

신학기가 시작되고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가자, 아이는 본격적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교는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어 한국에서보다 아침 시간이 바쁘다. 매일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꿈꾸지만, 매번 좌절하면서 허둥지둥 준비물을 챙겨 가방을 들고 아이보다 먼저 바깥으로 나선다. 현관문 앞에 낯선 물건이 하나 보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한자로만 빽빽이 채워진 포스트잇이다. 우선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고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정문으로 향한다. 학교 버스에 몸을 실은 아이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어 보이고 쪽지를 확인했다.

아침 일찍 발소리, 식탁 의자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주의 부탁합니다.


두 줄가량의 메모 내용은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겨우 해독할 수 있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중국인으로서는 극히 평범한 필체일지 모르겠으나 외부인이 보기에는 한없이 멋들어진 한자로 당부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식탁 의자를 옮기는 삐거덕 소리와 거실을 뛰어다니는 종종걸음 소리가 거슬렸나 보다. 솔직히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진한 월넛색의 무거운 목제 가구는 주인의 취향대로 방마다 놓여있었고 그것을 옮길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식탁 의자는 불가피하게 매일 움직이게 되었다. 옮길 때마다 육중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둔중한 소리가 났더랬다. 거기에 더해 현관으로 후다닥 뛰어나가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어야 하는 고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몇 동 몇 호에 사는 이웃인지 소재는 특정할 수 없었지만, 아침 등교 시간의 소란스러움을 참다못해 점잖게 언질을 준 것이었다. 직접 와서 따지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웠다.


황 선생은 지역 대학에서 영어영문을 전공하는 졸업반 학생이다. 그는 소수민족이고 4형제 중에 맏이였는데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같은 호적에 올리지 못한 형제가 있었다. 우리 집 중국어 과외 선생님이던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고 그래서 마오쩌둥과 그 일당의 오류를 많이 지적했다. 물론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했던 것이 실수였다. 유치원생의 언어로 물어봤건만 그는 사자성어를 인용하여 상황을 정성껏(어려운 말로) 설명해 준다. 종종 알아듣지 못해서 당황하는 눈빛이 되면 네 개 혹은 그보다 많은 한자를 공책에 친절하게 써주었다. 그것을 보고 난 후에야 겨우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사성어를 좋아하는 중국인의 화법에 항상 진땀이 났다.


황 선생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한국의 젊은이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고 특히 정치나 사회구조의 문제점에 많은 관심과 불만을 토해냈다. 그래서 신변잡기를 주제로 시작한 가볍고 산뜻한 대화는 줄곧 정치나 국제문제로 빠져들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어조는 더 분명해지고 특정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미사일을 쏘아 올렸고 전쟁 피해국으로써 우리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으니 항상 이런 이야기를 화두로 할 수 밖에....


황 선생은 한 시간에 40위안(약 7천 원)을 받고 공공버스를 한 번 갈아타 가면서 우리 집에 와주었다. 나중에 50위안으로 과외비를 올릴 때까지 성실하고 착실하게 우리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아이에게는 (중국인) 친구와 같았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지역학교에 다녔고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이중국적을 가진 중국계 친구들은 영어를 더 편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대부분 대충 중국어를 알아듣지만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지역 학교로 가면 (진짜) 중국인 친구를 만날 수 있지만 한국인이 지역 학교에 가려면 엄청난 공부량을 감당해야 했다. 교과서의 많은 부분을 암기해야 하고 영어 수업을 받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중국 땅에서 사는데도 언어나 문화를 제대로 배우거나 향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황 선생은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한창 소녀 감성이 폭발하기 시작한 아이와 자질구레한 액세서리, 스티커 사진 같은 것을 쳐다보면서 시시덕거리고 중국 노래를 같이 듣고 부르는 등 어른 눈에는 쓸데없는 것, 하지만 그 시기에 꼭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눠주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새로 생긴 서점을 함께 가보고 아파트 공원에서 줄넘기하는 모습을 지켜봐 주던 선생은 취업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면서도 자기 후배를 후임으로 소개해 주는 책임감을 끝까지 보여주었다.  


중국의 아파트 단지를 **화원(花园)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국인에 못지않은 작명 기술을 가진 중국인도 아파트에 거창한 이름을 붙여준다.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도 'Swan's castle'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은 물론 아니었지만 이름에 걸맞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시사철 이름 모를 꽃과 나무가 건강하게 무성했고 곳곳에 이국의 신전 같은 건물(휴식 공간)과 야트막한 언덕, 인공호수, 수영장까지 있어 커다랗게 한 바퀴를 돌면 나름대로 운동이 될 정도였다. 넓고 다채로워서 걸으면서 보이는 풍경이 지루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주변을 돌았는데 가끔 뱀이 벗어던진 껍질을 발견하기도 했다. 한국보다 훨씬 지독한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모기가 많았고 집안에서도 도마뱀이 자주 출현하여 질겁하게 만들었다. 뱀 껍질은 운 좋게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고 극성맞은 모기는 모기 퇴치제를 쓰거나 바깥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작고 가느다란 몸집을 가진 도마뱀이 집안으로 쳐들어오는 것까지 막아낼 수는 없었다.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존재는 아니지만 한집에 같이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 귀뚜라미나 개구리, 두꺼비를 발견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집안에서 같이 있으려니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매일 화들짝 놀라 피하기만 하다가 용기를 내어 잠자리채로 포획에 나섰다. 망 안쪽으로 밀어놓고 창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계획이다. 멀찍이 서서 집안을 활보하는 도마뱀을 향해 잠자리채를 던졌다. 망 안으로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잠자리채의 끝부분이 도마뱀의 꼬리를 내리쳤고 꼬리를 맞은 도마뱀은 꼬리만 남기고 도망쳐버렸다. 5센티도 안 될 것 같은 주인을 잃은 꼬리는 혼자 남았지만, 아직도 좌우로 유연하게 움직여댔다. 으악, 이놈의 꼬리는 어떻게 치운담.


꼬리 절단 사건 이후 도마뱀 포획을 포기하자 도마뱀은 줄곧 집안 곳곳에 출현했고 이들은 점점 대담해지는 것 같았다. 바닥이든 벽이든 가리지 않고 나타났고 가족이 모두 모여 TV를 보고 있는 방안에도 들어와 벽을 타고 한참을 머물다가 사라지곤 했다. 인간에게 무해한 생물일 테니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주 적의를 품었고 매번 그 존재에 화들짝 놀랐다. 인간의 발소리, 말소리, 기척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물체와 함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을 친숙하게 생각한 것일까. 도마뱀도 우리를 무해한 존재라고 생각한 것일까.


수영장 옆 인공호수에서 낚시가 한창이었다. 이미 낚시통에 제법 큰 물고기가 서너 마리가 있는데 그물에 한 마리가 또 낚였다. 그걸 먹을 작정인지 무척 궁금했지만, 그저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몰래 사진을 찍었다. 50미터 정도 앞서서 아파트 정원을 걸어가던 속옷 차림의 할아버지도 기웃거리면서 뭐라 한마디 보탰다. 할아버지는 구두를 신고 속옷 상의에 가죽 허리띠를 두른 반바지를 입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뒤에서 바라보니 팔을 흔들 때마다 황금 시계가 번쩍거린다.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것이 운동 습관인 듯 매번 같은 차림의 할아버지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좀 더 너른 마당으로 나가니 역시나 상의는 속옷만 입은 어르신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서 한참을 버티고 있다.




아이가 방학을 맞이하면 쏜살같이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나 형제의 집에서 몸과 마음을 쉬게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 개학을 앞두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진짜 집으로 돌아가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황금 시계 할아버지, 물구나무 어르신, 작지만 겁 없는 도마뱀, 소음을 참아준 점잖은 이웃, 계절마다 아름답던 나무와 꽃, 그리고 마음을 나눠준 황 선생이 있어 중국에서도 진짜 우리집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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