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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지붕 B사감 Aug 01. 2024

(명품을)배우다

짝퉁(山寨, 산자이)으로 배운 명품

상점가에 들어서자마자 담배 연기, 음식 냄새, 묘한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선 이 냄새를 이겨내는 것이 첫 관문이었다. 전체 건물에 가득한 이 냄새가 머리부터 발끝, 손톱 사이까지도 흡착되어 집에까지 퀴퀴한 냄새는 따라왔다. 하지만 일년내내 여름같이 덥고 습한 이곳의 기후 탓에 강한 냉방으로 시원해진 내부 공기가 반갑기도 했다. 건물 안에는 작고 네모난 가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자기 몸보다 훨씬 커다란 비닐봉지에 물건을 넣어 이고 지고, 질질 끌면서 체구가 작은 남방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상점과 상점 사이에 가까스로 자리한 좁은 복도에는 점원들이 의자에 앉아 십자수를 놓거나 여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가볍게 호객하는 이도 있었다. 2009년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짝퉁 시장의 첫인상이다.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 엄마는 졸업식에 입고 갈 번듯한 재킷(일명 마이)를 사주셨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던 **패션에서 카키색 재킷을 입어 보았을 때 배가 사르르 아플 정도로 들뜨는 마음이었다. 그게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획득한 유명 브랜드 상품이었을 게다. 그 이후로 유행하는 패션에 극성맞게 예민했던 언니 덕에 덩달아 나이키 흰분(흰색 바탕에 분홍 로고)도 신어보았지만, 브랜드 로고가 보이는 게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검은 옷에 검은색 로고를 은근슬쩍 보여주는 패션이 아닌,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었던 옷이나 신발을 착용할 때면 괜히 주목받는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사춘기여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되도록 튀지 않는 차림새를 선호하는 성격 탓에 몸에 지니는 거의 모든 것들은 경제적인 것들, 가성비 좋은 물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명품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명품을 알아보지 못했고 멋짐을 느끼지도 못했으며 고가의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인민들이 착용하고 있던 명품(=짝퉁)도 잘 알아보지 못했다. 도로에서 공사하는 노동자나 버스요금 1위안(약 150~200원)을 아끼려고 자전거로 한 시간 넘게 왕복하는 청소 노동자도 명품 로고가 크게 새겨진 신발, 티셔츠를 자주 착용하고 있었다. 한 시간에 40위안을 받던 마사지 노동자도 그런 물건들을 지니고 다녔으니 그들을 보면서 차츰 브랜드의 로고를 배웠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들이 쉽게 입고 걸치고 다니는 물건을 파는 짝퉁 시장을 가보니 백화점에서 파는 진품과 거리에서 만나지는 가품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졌다.


개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하고 서울 지옥철처럼 별로 붐비지도 않는 지하철을 타고 30여 분을 달리면 그곳, 짝퉁 시장에 갈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각종 차를 비롯하여 백화점이나 다름없이 많은 종류의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짝퉁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히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의류를 비롯하여 가방, 쥬얼리, 스카프 등 소위 패션잡화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다양한 상품은 한국인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말하는 특A급은 진열장에서 홀로 고고하게 조명을 받고 있기도 했지만, 루***, 구*, 샤*, 프** 등 대부분의 가품을 대충 쌓아두고 팔고 있었다. 백화점 명품관처럼 충분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뽐내고 있지 않아서인지 전혀 값나가는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몇 번이나 갔을까? 거의 4년을 거주하면서 몇십번 아니 백번 넘게 갔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구경만 하다가 돌아왔지만, 차차 명품 사대주의가 발동한 탓인지 발길이 잦아졌고 혼잡한 상점 분위기에도 익숙해졌다.


짝퉁 시장에서는 아이 친구의 엄마를 만나기도 하고 동네 아파트 주민과 마주치기도 했다. 마치 교민 사회 집합소같이 꽤 많은 한국인이 다양한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명품 브랜드를 접한 적이 거의 없으니, 로고와 이름을 매칭시켜 머릿속에 기억시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명품 안에서도 클래스(등급)가 엄연히 존재해서 가방 하나에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브랜드가 있는가 하면 기백만 원이면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짝퉁 시장에서도 몇십만 원을 호가하던 에***는 별도로 취급되며 비싼 몸값을 자랑했고 상품의 완성도에 따라 가격 차이도 크게 났다.


시장에서 처음 구입한 물건은 모르는 브랜드의 나일론 가방이었다. 중국 돈으로 30위안(5천 원). 생각보다 물건이 많이 들어가고 가볍고 가격 부담이 없어 두어 개 샀다. 당시 한국식당에서 한국식 짜장면이 40위안 정도였으니 혹시 품질의 문제가 있더라고 얼마든지 사볼 수 있는 가격이었다. 짝퉁 시장에서 파는 물건에는 품질보증서도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보증받으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제품의 모든 부분의 디테일은 진품과 다르지 않게 구성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더스트백에 넣어서 건네주는 것까지도.


명품을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많은 진품을 소유한 사람도, 브랜드 이름조차 헛갈리는 사람도 다들 무슨 열풍이 분 것처럼 짝퉁 시장에서 만나졌다. 누군가 구입한 물건의 품질이 좋다는, 가격이 저렴하다는 소문은 널리 널리 퍼져 한국인에게 성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짝퉁 시장에는 가격이 없다. 그래서 정찰제가 아닌 시장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야, 내 친구가 여기서 이 가격에 샀어. 지난주에.
원재룟값이 올랐어. 이제 그 가격에는 안돼, 손해야.

이런 흔한 대거리가 연출되던가,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된다는 듯이 너에게만 스페셜 프라이스에 준다며 전자계산기를 두들겨가며 몰래 가격을 제시하기도 했다. 손님도 은밀하게 다른 가격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가격을 후려칠 때면 중국인들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해대면서 가게에서 내쫓았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는 해맑게 단념하면 됐지만 경험이 쌓이고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자 기분은 상하고 물건에 대한 욕심은 더 커졌다. 그렇지만 자존심 때문에 굽힐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이 되곤 했다.   


그렇게 짝퉁 시장에서 사들인 물건들은 귀국할 때 엄격한 심사를 거쳐 상당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이미 몇천 원짜리 가품 시계는 비행기 안에서 기압이 높아지자, 뚜껑이 날아가거나 시침과 분침이 떨어져 시계의 기능을 상실했다. 노란 돼지 본드의 흔적만 남고 가방 로고가 없어지기도 하고 끈 한쪽을 지지하던 나사가 어느샌가 실종되기도 했다. 그들이 같이 동봉한 품질보증서를 가지고 간다면 사후 처리를 해주었을까.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명품을 사들인 우리는 불량 짝퉁 사례를 주고받으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으면서 넘겼다. 용케 한국까지 함께 돌아온 것들도 뭔가 지나치게 과감한 디자인과 색감에 부담을 느껴 하나씩 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곁에 남은 작은 가방은 부끄러운 그 시절을 소환한다.


물론 진품과 비교할 수 없는 가격이었지만 무분별하게 사들인 것들을 모두 합하면 상당한 지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 발을 들이자, 고유 디자인의 무분별한 복사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지식재산권 나부랭이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고 쓸데없는 지출을 하고 있다는 각성도 좀처럼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집에는 가방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가방걸이가 있을 정도로 그 도시에서 명품 가방을 손에 넣는 일은 햄버거 몇 개를 안 먹으면 가능한 정도의 가벼운 부담이었다. 물건을 쉽게 사고 쉽게 폐기해 버리는 한때의 유희였다고나 할까. 아직도 그 시절 구입한 가방이나 시계를 곱게 들고 나타나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토록 열심히 담배 연기를 뚫고 상가를 헤집고 다녔던 건,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광풍에 휩쓸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진: https://instagram.com/js_vfinde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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