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009년 8월, 더운 한국을 뒤로하고 더 더운 중국의 남쪽으로 이주했다.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은 두 번째이지만 기분은 사뭇 달랐다. 혼자 홀연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걸릴 것 없었던 첫 번째 이주와는 달리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비자의 성격이 달랐고 아이의 학교 문제가 있었고 체류 기간도 길었으며 한국과는 다른 체제의 나라여서 적잖이 긴장되었다. 세계 최대의 공산국가에서 살아보기, 어떻게 생각하면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한, 인생에 있어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사람도, 땅도 낯설고 기후대도 다른 이 도시에서의 생활은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
떼놈(되놈), 짱께
본래의 뜻과 상관없이 중국 혹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들이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요즘에는 조금 줄었을까. 이 두 단어는 아버지가 자주 애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이 두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쭝국 놈들'이라고 세게 발음하면서 혐오의 감정을 누그러뜨린 적이 없었다. 위스키나 코냑 같은 양주는 좋아해도 고가의 고량주(백주)는 몇 년째 어두운 창고에 처박아두셨다. 어느 나라나 힘을 가진 것들이 하는 짓이란 야만적이건만 유독 중국이라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견 일관성없는 태도 같지만 보통 우리 주변 사람의 시선일지도 모른다. 인접국끼리 오랜 세월 서로 얽힌 것들은 쉽게 풀릴 새도 없이 새로운 싸움거리는 끊임없이 더해져 갈등은 깊어지고 단단한 혐오의 뿌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버린 중국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물론 당사자들도 기대에 부푼 마음은 아니었다. 우리가 이주한 2009년은 그나마 중국이 경제발전과 함께 소프트파워를 내세우며 세계인들과 친해지려는 몸부림으로 그전과 다르게 많은 것이 개방되던 시기였다.
삐사감은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 엄마들과 친교를 쌓는 일에 지쳐갈 무렵, 외국에서 새로운 친구와 배움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등교 전에 식탁에 앉아 단어 시험을 준비하고 서툰 문장으로 대화문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하루 네시간씩 학교 의자에 꼬박 앉아 나이와 국적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 친구와 공부할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인, 러시아인, 체코인 등 잘 알지 못하는 나라 사람들과 중국어로 어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의 대화는 깊이 들어갈수록 물음표가 가득 쌓여갔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상대의 말과 몸짓에 집중할 수 있었고 짧은 쉬는 시간의 마무리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중국어 자격시험을 준비해서 좋은 점수를 따냈다. 짝꿍이랑 함께 외운 대화문을 떠올리며 시장에서 써먹어 보았다. 아, 잘 안 먹힌다. 돌아오는 대답이 교과서대로 일리가 없었다. 그래도 불법 비디오 가게, 과일 가게, 식당을 돌면서 한 마디라도 떠들어 보려고 시도해 본다. 함께 학교에 다니던 한국 아줌마 그 누구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단어시험은 항상 거의 백 점에 가깝게 받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쇼핑만 열심인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15년 전 그 나라를 주변이 아름답고 평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공간으로 기억한다. 돌아오자마자 시작된 한국 학교의 경쟁이 그 시절을 더 그리워하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여 체육활동을 하고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과정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선전과 홍콩의 관광지가 아니라 그 시절 우리가 살던 동네의 산책길과 친구들과 햄버거를 나눠 먹고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를 구경하던 학교 언저리 상점가일 것이다.
이 나라,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여러 날, 여러 곳에서 충분히 안전하게 즐길 수 있었다. 이 나라(사람)를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중국 생활에서 느낀 이질감, 모순, 괴이함 등은 다른 외국에서도 느끼던 정도의 것이었다. 정말, 참 이상한 일(사람)은 어디에서나 불현듯 나타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가끔 난생처음 보는 일(사람)이 있으니깐. 요컨대 그저 사람 사는 곳이었다는.
미운털을 빼내는 일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웃한 나라끼리 흔히 가지게 되는 악감정은 평생 극복해야 할 과제일 뿐 우호적인 관계는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이상향일지도. 삐사감도 다른 사람들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중국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중국이 또 중국 했구나, 라며 저절로 비아냥거리는 마음이 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다가도 우리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억해 내고 그게 다는 아닌데, 라며 중얼거린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어처구니없는 재난이 반복되는 것이 한국의 전부가 아닌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