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여서 좋을 때를 말하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만 발견되는 나의 고유한 아름다움, 훌륭함이란 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좋은 모습을 볼수록, 나 역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관계에서는 마르지 않는 시너지가 샘솟는다. 지나친 미화에만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당신 곁의 수많은 거울들을 떠올려보라. 어떤 거울 앞에서 나는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출근길 열차에서 김이나 작사가의 '보통의 언어들'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복사해 남편에게 보냈다.
"집으로 올라오던 길에 해준 말이 여기에도 있네! 늘 고마워."
- "우린 사랑하기에 좋은 사이야." (오글)
어린이집은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방학이 있다. 초등학생처럼 길지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온전히 부모 손길이 필요한 생후 17개월 아들의 방학은 1주일도 길게만 느껴진다. 빌릴 손도 없으니 남편도 나도 방학에 대비해 휴가를 아껴 썼다.
그런데 남편이 방학 기간에 휴가를 못쓸 것 같다는 천정벽력 같은 비보를 전했다. 추워진 날씨 때문에 맡은 공사 현장들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어떡하라고? 애를 일주일 동안 혼자 보라고?'
억울한 마음이 손 쓸 새도 없이 불쑥 올라왔다. 쉬고 싶을 때 쉬지 않고 쓸 휴가와 휴가를 쓸 수 있는 여유를 애써 만들어 놓은 건 나인데, 애를 혼자 봐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을 원망했다. 주말에 둘이서 아이 하나를 보는 것도 버거운 마당이었으니까. 남편도 난감해했지만, 정말 도저히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휴가각이 안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아이와 함께 친정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는 여전히 내가 마크해야겠지만, 끼니라도 친정 엄마가 챙겨주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혼자 어떻게 아이를 보육할 수도 있었겠지만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도 복용 중인만큼 무리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전혀 쉬지 못하는 연말 휴가 겸 아들의 방학은 예상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오로지 아이와 둘이 보낸 이 시간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육아를 하는 엄마들이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그 시간은 '힘든 만큼 참 좋았다.'
퇴근 후 잠깐 볼 수 있는 아이의 웃는 얼굴을 방학 때만큼은 하루 종일 볼 수 있었으니까. 17개월이 된 아들의 성장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랬다.
바다가 보이는 친정에서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와 일주일을 보내고, 아이의 밤잠 시간에 맞춰 밤 8시에 다시 집(이라고 쓰고 현실이라고 읽는다)으로 돌아가는 길.
먹다 남은 커피잔들이 쌓여있는 컵홀더를 보니 편도 4시간 반을 운전하고 와서 하루도 안되어 다시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안쓰러웠다.
아이가 곧 잠이 들어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이 반갑기도 했고, 늦은 밤에 오랜 시간 운전을 해야 하는 남편이 졸릴까 싶어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나더러 결혼 잘했대. 나보다 네가 더 고생한다고... 안쓰럽대. 사위 사랑은 역시 장모님인가."
- "그럼 너는 언제 결혼 잘했다고 생각했어?"
만난 지 11년, 결혼한 지 7년 차가 된 새해 첫날, 갑자기 '결혼 잘했다고 생각할 때'를 묻는 남편이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내가 써둔 글을 찾아 읽어주었다. 컨셉진 인터뷰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12월,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쓴 답변이었다.
남편이랑 함께 있을 때예요. 저 스스로도 잘 몰랐던 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고,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제 남편이거든요. 물론 사회에서 보여주기 싫은 제 본연의 모습도 (방귀마저도...) 스스럼없이 보일 수 있고요. 제가 가장 고맙다고 느낄 때는, 제가 미워하는 제 모습도 긍정적으로 봐주고 그렇게 표현해 줄 때예요. 해가 갈수록 그런 사람과 평생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느껴요. 내 모든 걸 다 보여줄 수 있어서 고마운 사람이 제 곁에 있어 감사합니다.
혹시나 남편이 운전하느라 한 글자라도 놓칠까 또박또박 천천히 읽어주는데, 진지하게 듣고 있던 남편이 귀여웠다. 남편이 "또?"라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하하)
이 글만 보면 남편과 내가 지난 10년 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부부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맞벌이 육아를 시작하고 싸우지 않은 주간이 없을 정도로 파이팅이 넘치는 매일을 보내는 일개 맞벌이 부부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남편과 이런 얘기를 하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우리가 '우리'여서 좋은 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싸우다 보면 그 좋은 점은 아주 쉽게 잊힌다.
하지만 잊혀졌을 뿐이니 감사일기를 쓰듯 굳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의식 같아도, 그 의식의 긍정적인 효과는 들이는 힘에 비해 훨씬 크게 느껴졌다.
이제 내가 물을 차례였다. "너는 언제 결혼 잘했다고 생각했어?"
남편은 음... 하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평소 굳이 말로 하지 않았지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얘기를 들으니, 그 얘기를 듣기 전보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고,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서로의 거울인 부부. 기왕이면 좋은 것을 비추고, 서로의 눈에서 자신의 좋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부가 되면 새해의 시작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