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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Jan 25. 2021

화가 나면 필사를 하는 이유

힘들어도 좋다는 , 자위가 아닌 진리였다

힘들어도 좋다고 하는 엄마들의 말을 일종의 자위 같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육아를 하고보니 그 말은 자위가 아니라 진리였다.



몸살 날만큼 힘들어도 아이가 좋아하면 나도 덩달아 좋아지는 육아는 인생처럼 모순덩어리였다. 힘들면서 동시에 좋다는 감정이 생긴다는 건 정말이지 미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세계에 소속되는 것이다.



힘들어도 좋다지만 매일 매순간 승기를 잡는 감정이 다르다. 어떤 날은 좋다는 감정이 우세하고, 어떤 날은 힘들다는 감정이 우세한다.




나의 필사노트, 소소문구의 디깅노트





화가     있는  필사 

아이가 밥을 뱉고 세월아 네월아 밥을 먹어도, 울고 떼쓰며 소리를 질러도 괜찮은데, 재우는 시간이 길어지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조바심이 절박함으로, 절박함이 분노로 바뀌기 때문이다.



아이가 누운지 1시간 째가 되자 나는 아이방을 나와 남편 더러 재워달라고 하고 안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그리고 아까운 ‘내 시간’들을 악착같이 붙드는 심정으로 필사노트를 펼쳤다.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다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든 표출해야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글씨가 적히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필사를 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렇게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하는 필사는 오타가 많고, 글 본새도 별로다. 그래도 필사할 글과 단어에 집중하며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써본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참을 인을 되새기며.



화가 주체없이 날 때면, 콩콩 뛰기도 하고, 참지 못해 나오는 비명을 막기 위해 이를 악물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못난 말을 퍼붓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필사는 조금 달랐다.



다른 누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화풀이를 하지 않을 수 있고, 좋은 문장들을 보고 따라 쓰면서 화난 감정에 대한 집중을 흩어버릴 수 있으며, 손으로 직접 글자를 쓰는 행위를 통해 복잡했던 마음이 단순해졌다. 동시에 내가 그토록 원하던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필사 중인 책은 김이나 작사가의 ‘보통의 언어들’이었다.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어쩌면 지르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누구에도 상처주지 않고, 분노를 가라앉히며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필사였기에 그렇게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소리를 지를 수 없을 땐, 지금처럼 필사노트를 챙겨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나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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