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기로 했습니다’
10년 동안 블로그를 하면서 여행기를 기록해왔다. 신기하게도 블로그에 기록한 사진과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또렷이 기억난다.
하지만 기록한 것이 여행의 전부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기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닫는다. 기록은 기억과 다름 없는 것이라고.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할지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순 없으니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해지고, 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해지겠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기만의 기록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게 됩니다. ... 기록해둔 '지금'은 분명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려줄 테니까요."
-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기록생활자 김신지 작가님은 책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를 통해 다양한 기록을 통해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찬찬히 알려주었다. 대단한 기록이 아니어도 시간이 쌓이면 귀해진다고.
덕분에 고등학교 이후로 쓰지 않았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손으로.
아이가 자라면서 매일 아이만의 시각으로 새로운 문장들을 말하는데, 그 말들을 밤마다 남편과 침대에 누워 나누는 것만으로는 아쉬웠던 찰나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기록해서 기억하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일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던 건 작가님이 쓰신다던 '5년 다이어리' 때문이었다.
5년 다이어리는 한 페이지에 같은 날 5년 동안의 기록을 쌓을 수 있는 템플릿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0월 25일 페이지에는 5칸의 박스가 있고, 각 박스에 2021년 몇 줄, 2022년 몇 줄... 그렇게 2021년 10월 25일부터 2025년 10월 25일까지, 5년이 한 페이지에 고스란히 담긴다.
여러 N년 다이어리 중 구입한 건, 100년이 넘은 독일 문구회사 로이텀1917(leuchtturm1917)의 'Some Lines A Day'.
마치 '일기 거창한 거 아니야. 그냥 몇 줄만 쓰면 돼.'라고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짧게 써도 된다니! 의지박약의 나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이름이었다.
하루에 몇 줄만 써도 칸이 차 버리는 다이어리, 일기를 쓸 때마다 과거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다이어리, 시간이 쌓여 근사해지는 다이어리. 노트를 보고 마음이 설렌 건 처음이었다.
다이어리를 쓸 때면 지면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 노트를 열었다 덮었던 적이 많았다. 나중엔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겨두기도 했다. 노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몇 줄만 쓰면 된다'는 간단하지만, 놀라운 발상은 매일 일기를 쓰며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김신지 작가님 말대로 일기는 놀라운 녀석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매일 해내면, 일상에 먼지처럼 떠돌던 불안감 -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 이 점차 사라집니다. 일을 미루거나 해야 할 일로부터 늘 도망치는 사람(네, 접니다)이 평생 느껴온 자책감, 나는 안 될 것 같다는 무력감도 희미해지고요. 무엇보다 스스로의 꾸준함을 비로소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하루 한 줄씩 일기 쓰기'를 실천할 만한 꾸준함이 있다면, 다른 것도 비슷하게 해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뿐인데 자신을 믿게 된다니, 일기는 아무래도 놀랍습니다."
-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요즘 잠들 시간이 다가오면 '일기에 무슨 얘기를 쓸까?'하고 즐거운 고민을 한다. 늘 바빠서 어제저녁에 뭘 먹었는지도 까먹고, 지쳐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다 그대로 잠들었었는데 일기를 쓰고 나선 그런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기를 쓰다 보니 하루 동안 즐거운 일이 많다는 걸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일도, 기록하고 싶은 것도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노트에 손으로 기록하는 기쁨이 이런 거였지. 필사와난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매일 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훗날 돌아볼 기록이 과거를 반성하게 해주어서가 아니라 현재에서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을 꾸준히 보내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그 시간은 인생에서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도록, 반대로 내게 중요한 것들은 지키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일기를 쓰는 시간은 나를 새롭게 알아가는 시간이었고, 힘든 일보다 쉽게 잊혀지는 감사한 일들을 떠올리며 지친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결되는 세상 속, 빈 노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편리함을 효율성으로 자주 오해한다. 지름길로 갈 때,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생각하는 기회를 상실한다. 손으로 쓰는 일이 짐짓 향수에 젖은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 기회를 되찾도록 도와준다. ... 의도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멈추는 것이다."
- '불렛저널', 라이더 캐롤
로이텀1917의 모든 문구는 이 강력한 신념 아래 제작된다. "Writing by hand is thinking on paper."(손으로 쓴다는 건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노트는 초연결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개인적인 공간을 허락해준다. 노트와 펜만 있으면, 누구의 방해 없이 그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불렛저널의 저자 라이더 캐롤의 말대로, "잠시 멈춰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적는 단순한 행위는, 간단한 정리 그 이상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쓰게 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시도해볼 수 있다.
매일 잊지 않고 쓰기 위해 다이어리와 펜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나는 매일 밤, 다이어리를 만날 시간을 고대한다. 일기를 쓰며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