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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Mar 18. 2022

이혼할 마당에 진급이 무슨 소용이니

위기의 순간에 알게된 것들

"네 삶의 우선순위에 내가 있기는 한 거야?" 일주일 만에 침묵을 깬 남편의 첫 마디였다.






최근 3개월 동안 2번의 병가, 2번의 휴가를 썼다.



모두 아파서 쓴 휴가였다. 두통이 너무 심해 고개를 가눌 수 없을 때에도 4시간마다 타이레놀을 먹으며 일했고, 병원을 가야 할 시간에는 야근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를 재우고 밤 12시까지 일을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나도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고, 남편과 얘기는커녕 농담도 할 여유가 없었다.



약의 힘으로 버티며 몸을 갈아 쓰다 결국 아파서 휴가를 쓰게 되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와 기력이 하나도 없는 아내를 돌보는 건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일이 많은 연말에 대직 업무까지 맡게 된 상황에서 계속 아팠으니, 나는 해야 할 일을 온전히 해내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일을 누구한테 나눠 줄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일은 늘 나의 최우선 순위였다. 좋아서가 아닌, 최소한의 책임감이었다.



1순위는 일 그다음은 아이. 그다음은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다음이... 남편이었을까?



사랑이 많은 남편은 언제나 나에게 먼저 다가왔지만, 그의 관심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체력도, 마음도 한계여서 배터리가 다되면 전원이 꺼지듯 아이를 재우고 나면 나도 함께 방전됐다.



남편은 그래도 관심을 갖고 말을 걸어주고, 손 한 번 더 잡아주었고, 좋아하는 예능을 같이 보자고도 했지만 거절했다. 정말 미안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남편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기다려 달라는 얘기를 꺼냈다. 남편의 일방적인 관심과 나의 일방적인 거절이 반복되다 내가 혼자 있게 해달라는 말을 하자, 결국 남편도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도 지쳤던 것이다.



Photo by Casey Horner on Unsplash







"그렇게 아프면서 병원도 못가면서까지 야근을 해야 해?"

- "일을 줄일 수 있었으면 나도 줄였지. 그런데 지금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얘기했잖아. 아픈데 나라고 집에 와서까지 일하고 싶겠어?"


"안 되는 게 어딨어? 네가 이렇게 아픈데!"

-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퇴사 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이번 주에 퇴사하겠다고 얘기할게."



내 입장에선 회사를 나오는 것만이 이 모든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픈 데 회사 눈치 보면서 내 일도 아닌 일까지 하는 게 지긋지긋했고, 무엇보다 남편과 사이가 이렇게 틀어진 채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며 '이혼'을 생각하게 되는 게 싫었다. 한동안은 다른 누군가가 '힘들다'는 말만 해도 눈물이 쏟아졌다.



"너 곧 과장 달 거잖아. 진급하고 그때 퇴사 생각해보자."

- "이혼할 마당에 진급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너 퇴사할 때까진 참으면서 버텨볼게. 내가 너한테 더 기대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도 살 수 있는 거지. 진급 예정인데 이렇게 그만두는 거 너무 아깝잖아."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남편도,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나도 안쓰러워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새해의 나흘을 안방 침대와 병원 침대를 오가며 보냈다. 죽지 못해 숨만 겨우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엔 주사를 맞아도 고통은 그대로인 것이 무기력해서 울었다. 죽 한 숟가락을 30분 동안 나눠 먹다 그대로 버렸고, 말할 힘도 없어 매사에 남편이 내 목소리가 되어주었다. 아이는 시댁에 맡겨져 1주일 가까이 보지 못했다.



남편은 퇴근하고 돌아와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래 손가락을 갖다 댔다.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는 나를 죽을 고비까지 데려.



사람이 이렇게 죽을  있겠구나.’ 어렴풋이 생각했다. 병원에서도 해줄  있는  쉬라는 조언뿐이었다.



떠밀려 삶의 변곡점에 서있었다. 떠밀려 살다 정말 떠밀려 사라지기 , 이제는 삶의 주도권을 다시 나에게 가져와야 했다. 그렇게 코너에 몰려  일은  종이에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해서 매일 챙겨야 하는 일들을 적어보는 것이었다.



- 약은 제때 먹었는지

- 잠은 잘 잤는지

- 남편과의 사이는 어땠는지



위기의 순간이 되어서야  삶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았다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챙기며 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떠밀려 살다보니 정작 중요한 것들은 뒷전이 되었다.



이제는 잊지 않을  있을  같다. 건강을 챙기고, 잠을 충분히 자고, 남편과의 시간을 보낼 여유를 갖는 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제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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