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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밤 May 18. 2022

퇴사로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워킹맘의 퇴사 한 달 후

퇴사를 하고 나니 알게 됐다. 퇴사만 준비하고, 퇴사 이후의 삶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퇴사만 하면 엉켜있던 모든 문제들이 마법처럼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단번에 바뀔 수 없다는 깨달음

퇴사 후 보낸 첫 한 주는 회사 다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집에 있는데도 긴장으로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고, 밤엔 여전히 잠을 설쳤고 옷이 다 젖을 만큼 땀을 흘렸다. 꿈엔 회사 사람들이 나왔다.



9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몸과 마음에 배어버린 긴장의 공기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일로 가득 찼었던 뇌가 갑작스레 맞이한 여백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것들로 채우려고 애를 썼다.



몇 년간 쉬지 않고 달렸던 사람이 단번에 멈출 수 없음을, 관성이란 무시할 수 없는 힘이라는 걸. 비우고, 이완하고, 여유를 갖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고,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 일을 하지 않는 낯선 시간을 견디며 삶으로 증명해야 결국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겠지.





워킹맘은 퇴사하면 전업주부가 되어야 할까

퇴사한 경험이 있으니 업무를 정리하고 인수인계하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회사에만 있지 않았다. 삶엔 많은 이슈들이 있었고, 퇴사 후엔 회사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하나 겨우 줄어든 것뿐이었다. 회사 이슈가 사라진 자리엔 잠시 잊혀졌던 다른 일과와 불안이 곧 자리 잡았다. 이런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퇴사는 ‘쉼’을 위한 퇴사였다. 아파서 쉬다 괜찮아지면 일하고, 다시 아프면 쉬다가 일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으니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멈춰서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이후엔 ‘일하던 시간에 쉬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에 퇴사했을 때와는 달리 나는 ‘엄마’였기 때문이다.



괜찮아지려고 퇴사를 했는데 하나도 괜찮아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운 날들. 그 당황스러움은 부부 갈등으로 이어졌다. 퇴사만 하면 막연히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한 두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거였다.



갈등의 원인은 돌봄의 ‘시간’이었다. 둘 다 일할 때는 절반씩 나눠 돌봄 노동을 했지만, 한 사람만 일하게 되면 일을 하지 않는 다른 한 사람이 돌봄을 전적으로 맡게 될 것을 남편은 무의식적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파서 퇴사하니 일하던 시간에 잘 쉬어야지 생각했던 나는 남편의 기대가 뜻밖이었다. 어차피 등하원은 오롯이 내가 맡게 되었기에, 저녁 시간은 전과 동일하게 ‘함께’ 돌봄과 집안일을 하겠거니 했던 것이다.



돌봄 노동 분담에 대한 정답은 없으니 상황에 맞게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선을 찾으면 된다. 다만 우리는 그 선에 대해 생각이 달랐고, 그게 이렇게나 다른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가 엄마를 더 좋아해서’는 아이에게 엄마가 있으면 더 좋은 이유가 되겠지만, 엄마가 돌봄 노동을 떠맡아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돈을 벌지 않는 ‘약자’라는 생각에 움츠러들기도 했다.



퇴사 후 3주 동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혼자 아이를 돌보았다. 고통스러웠던 3주가 끝날 무렵, 나를 퇴사에 이르게 했던 끔찍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구나. 약자고 뭐고, 나를 아프게 둘 순 없다는 간절함만 남았다.



파도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검은 밤바다 같던 내 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놨다. 저녁 시간에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로 회유하고, 윽박지르며 화도 내고, 사과하다 침묵하다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서게 되는 결말.



필연적 갈등을 겪은 뒤, 우리는 돌봄 시스템 V.2.0의 초안을 어느 정도 완성했다. 완성본이 되려면 더 많은 논의와 수정이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어렵게, 어렵게, 작은 평화를 쟁취했다.




하고 싶지 않은 걸 견디는 불행

겨우 침대에 누워 숨만 쉬고 있던 지난 겨울, 엄마는 나에게 한동안 매일 밤 전화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이제 네가 좋아하는 걸 해.”



엄마는 알았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들을 견뎌내다 끝내 병이 났다는 것을. 나는 그냥 적당히 맞춰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견뎌서 병이 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기에, 포기하지 않고 조정과 조정과 조정을 거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덜 싸우고, 상처는 덜 주고 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퇴사로 자연스레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퇴사를 결정할 때의 용기만큼 퇴사 후의 삶을 그려가는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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