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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3. 2023

나보다 나이 많은 집에 살게 될 줄이야

그래도 어쨌거나 새 집

1.

이사했다. 스무 살 때부터 나와 살았으니, 꼬박 8년 차다. 자취를 시작하고 이사는 이번이 두 번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 번째지만, 어쨌든 동네를 이동한 건 두 번째다.

온통 핑크로 가득했던 15년도의 자취방

2.

자취를 시작했던 곳은 5평 오피스텔이었다. 낡고, 좁고, 바람이 많이 드는 집이었다. 1층에는 업소 노래방이 있었고, 왕년에 은행일을 했다던 경비 아저씨는 불친절했다. 전세 4천만 원이라는 금전적 메리트를 포기하고, 새로운 집을 찾아야만 했다. 사실 그렇게 못 살 정도 까진 아니었지만, 아직 세상 팍팍한 줄 모르던 스무 살 아기는 그토록 쉽게 불행을 정의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편지 쓴 엽서보다 벽에 붙인 엽서가 더 많았다

3.

두 번째 집은 10평 오피스텔이었다. 넓고, 깨끗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주변엔 공원이 두 개나 있었고, 보안팀과 관리실이 따로 운영되는 곳이었으며, 도보 5분 거리에 역이 있었다. 같은 동에는 젊은 회사원들과 강아지도 많이 살았다. 컨디션이 좋은 만큼 월세 금액이 사악한 집이었지만, 그걸 제외하곤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올해는 이사해야 하는데 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연말을 닫는 게 오랜 습관이었다. 그렇게 그 집에선 무려 7년이나 살아버렸다.

새집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간 분리가 된다는 것!

4.

세 번째 집은 30년 된 와르르 맨션이다. 이번에도 월세다. 덕분에 고속 엘베 + 풀옵션 오피스텔에선 고민할 필요 없었던 것들이 이사 전부터 자주 나를 당황시켰다. 하수도법이라든가 사다리차 대여 비용이라든가 전화선을 랜선으로 교체하는 방법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직장과는 40여분이 더 가까워졌고, 8년 만에 방이 생겼다.

추억이 많았던 자전거 안녕

5.

7년 산 집을 나올 땐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텅 빈집을 한번 쳐다보고, 문을 닫고 나와 점심 메뉴를 고민했다. 떠날 때가 되어서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으론 상가 분식집에서 삼겹살 김치찌개를 먹었다.

계약 종료 날짜보다 조금 일찍 나가게 되어 중고로 팔 자전거는 두고 갔다. 다행히 자전거는 올리자마자 어떤 유학생에게 팔렸다. 당근마켓 문고리 거래에 맛들리면 대면 거래가 상당히 귀찮아진다.

깐쇼새우는 다음날 먹어도 맛있다

6.

이사 주간에는 남자친구와 친구들, 엄마가 고생을 좀 했다. 반포장 이사를 신청했기에 추가 인력을 세명이나 더 부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 작은 집에서 택배 박스가 스무 개도 더 넘게 나오는 걸 보고, 아직도 나는 날 잘 모르는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하루종일 옷가지를 정리했고, 남자친구는 선 자리에서 꼬박 한 시간이 넘게 설거지를 했다. 고마운 사람들. 밥을 한 번, 두 번, 세 번... 까진 모르겠고 그래도 두 번쯤은 더 사줘야 할 것 같다.

생각보다 작았던 350L 냉장고

7.

이번 집은 발품 팔기부터 계약, 이사까지 모두 혼자 했다. 어쩌다 보니 서른 전에 집 계약도 혼자 하고, 새 냉장고와 세탁기를 소유하게 됐다. 나만의 어른 기준에 부합하는 일을 두 가지나 해치웠는데, 막상 겪고 보니 그렇게 어른이 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카드빚이 조금 더 늘어난 20대 후반 여성이 되었다.

침대 하나만 겨우 들어가는 작은방

8.

이사 당일엔 정말 남의 집에서 자는 기분이었는데, 열밤 넘게 자고 일어나니 조금 우리 집 같다. 비록 엘베 없는 집 계단을 오르는 건 여전히 힘들고, 바꾼 현관 비밀번호도 아직 못 외웠지만... 회사에서 ‘집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할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공간은 이 공간이다.


몇 사람이나 머물다 갔을지 감도 안 올만큼 오래된 아파트. 그래도 새집은 새집이다. 이불 빨래나 설거지가 재밌어지는 걸 보면. 앞으로 생각이 날 때마다 차근히 이 집에서의 일상을 글로 남겨보려 한다. 신축 오피스텔을 떠나 구옥에서 사는 여자의 일상엔 웃기다가 짜증 나고, 조금 외롭다가 또다시 재밌어지는 순간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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