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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셉 Jul 04. 2021

[인박스] 자기 앞에 세워지는 일 外

21.3.29


"그는 '시에 다가감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앞세워진다'고 역설했다뿐이죠(251, <생각하는 여자>)"


1.

시적 은유와 서사적 풍경에 따르지 않더라도, 일상의 작은 틈에서의 명상으로 자신을 자기 앞에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더 극적인 명상이란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것들에 대한 속내를 경청하는 일이다. 이렇게 언제라도 우리는 자기 앞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끈질기게 바라보고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는 일이다.


21.3.31


"실존의 살아 있는 과정,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에 있는 말 그대로의 공간을 재사유하기. (중략) 이미 우리가 취하게 된 주체의 형태가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심층적인 변형의 과정을 사유할 다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중략) 자기자신이라는 감각에 여전히 매일같이 호소하는 세계에서 (중략) 이 환경과 그 속에서 유동하는 우리의 복잡한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 책임이다(279, <생각하는 여자>)"


1.

사이에 벌려진 틈을 유지하며 그 안에서 반드시 책임져야 할 질문에 마주하기. 질문에 대한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취해진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와 관계들 속에서 놓치고 있는 더 진실되고 풍부한 질문들에로 파고들기.


2.

물론 이렇게 적는 '나'의 태도는, 쓰여진 생각의 실행 계획을 오로지 자기 중심으로 상상하고 있다. 하찮은 의도가 근미래의 계획들을 유치하게 결정하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그저 어렴풋한 시선으로 바라볼 따름이다. 순간순간에 내가 취한 선택들이, 관심의 반향을 일으키며 분명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



21.4.13


1.

무엇이든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작은 열심들을 일단은 주어진대로 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솔직하지 못한 태도일 것.


2.

'여하간' 혹은 '일단'이란 말은 근래 자주 쓰는 말이다. 현실을 정확하게 마주하는 일이란 본디 흘러 들어온 과거와 앞으로 예견 가능한 미래들에 대하여, 이것들을 상대하며 지금 이 시간에 주어진 '함축'을 가늠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 것일게다. 그러나 '여하간, 일단'이라는 말은 그런 노력에 스스로 힘에 부치거나 혹은 지금 순간에 대한 만끽, 탐닉, 몰입하는 일을 선택하고자 취하는 방편으로 쓰인다. 오랫동안 사랑 받는 느낌을 심신으로 통하지 못해서 지금 순간들에 대하여 정확한 분간을 이루기 힘들어 하는 걸까.



21.4.23


1.

한동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잠히 그리고 꾸준히 내게 말을 걸어 오는 것들을 본다. 물론 평소에도 외면하지 않고 그 목소리를 생각의 상자에 고스란히 놔두기는 했다. 그러나 제대로 곱씹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2.

점점 글이 더욱 아리송해지고 있다. 이것은 사실 철학적이지도, 그렇다고 솔직한 심정을 알곡하게 써가는 시어도 아니다. 현재를 몽상 속에 가두고 욕망을 가리는 일 외로는 없다. 고통과 욕망은 결국 하나라는 점에서 나의 아리송은 이런 진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렸다.



21.4.24


1.

시간이 단 한번이라도 외부적인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완전히 그런 외부적인 객체로만 존재했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주관의 눈을 조금이라도 저버린 상태란 결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

사정이 그러하다면 현재의 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내가 개별적으로 선택한 순간들이 모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는 중일까. 예측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설령 선명하게 예감을 느끼더라도 결국에는 다른 형태의 고민으로 진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때에 나는 지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3.

언제든 다른 가능성, 다른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상상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는 언제든 시간의 다리를 잃은 가능세계들을 머리 안에 꽉 채우게 된다. 거기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가닿기 어렵고 미분하기 힘든, 그냥 몸뚱아리 채 던져진 순간만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4.

결국 영원한 순간이라는, 형용모순적이며 언어화하기 힘든 풍경 속에서 한걸음 무엇인가에라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과 사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될 인생일지언정, 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이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는, 그 누구도 아닌 결국 자기 자신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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