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17
1.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나'가 수백번 떠나간다. 순간들이 서로 겹치고 포개지면서, 완전한 추상도 완벽한 구상도 아닌 것이 마음을 거칠게 마모한다. 그런 와중에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나를 마주해야하는 역설 속에서 텍스트에 접근한다. 이러한 접근을 위한 사소한 방편들을 이 노트에 적는 것이리라.
21.2.22
1.
공허를 자연스럽게 나의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듯하다. 공허가 반드시 매번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며 다른 무언가로 채우지 않아도 된다. 공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을 내 것으로 하여,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갈 따름이다. 물론 전체로 보아 내가 우선순위로 세운 관심사가 공허에 매몰되지 않도록, 나의 시선은 공허 바깥에 두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뭐 여하간 지금은 투덜거리거나 한탄하기보다는 하나의 일을 잘 매듭지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녀는 '틀렸다는 느낌'이 '일종의 감정적 진리와 관련된' 것이라 말한다. '감정적 진리에 절대적 진리란 없어요. 글에 응답하는 자기 자신 속의 무언가가 맞다고 혹은 틀렸다고 느낄 뿐이죠(105, <생각하는 여자>)"
2.
이미 말해지고 뚜렷한 의미망을 가진 단어에서는 저 너머의 숨겨진 진리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 없겠지.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느낌일 뿐이며, 느낌은 쉽사리 신기루처럼 사라지거나 다른 느낌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우리는 글쓰기와 텍스트를 미루어 진리에 대한 잠정적 느낌에 접근하고 디자인해야 할 것이다.
21.3.3
1.
행동의 곶이 서려 있다. 행위들의 그림이 보인다. 그것들의 곶을 바라본다.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서 그들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각자의 작은 사정들을 마음에 품고 태도를 취하고 행동으로서 남에게 자기만의 곶을 드러낸다. 나는 솔직함을 가장하여 현재 내가 보인 곶이 사실 전부가 아니다는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 나의 행동에 담긴 진위를 모두에게 내어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시원함 보다는 공허함이 밀려온다. 착각일수 있다. 나는 사실 곶을 숨기고 방어하고 있는데, 곶을 드러내는 척 연기하는 것일수도 있다. 이런 착각의 구조로부터 기인하는 자기-피해 망상적 감정이...내게 주어진 진실인 걸까?
2.
단단한, 굳게 가지런한 마음의 힘줄을 가지고 삶을 저 너머의 것으로 상정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쉽사리 가정하거나 빈정대지 않고, 겸손함이 지닌 넉넉함으로 타인 속의 나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삶의 넉넉한 품이 갈수록 헤지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가 만든 핍진함이다. 겸손할 것. 또 감사할 것. 지금 순간마다의 일이 그 자체로 삶이라는 통각 속에서 - 물론 기적, 경이 따위의 순진한 마음이 아니라 - 보다 냉철한 견지 속에서 넉넉한 마음을 유지할 것. 수많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무한함이 지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도망가지 말 것.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이 전적으로 열린 시간을 향해 있음을 잊지말 것.
"달아나는 일과 가장 닮은 행위는 그것에 대하여 무방비하게 감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6, <불안의 서>)"
"방 안에 흩어진 여러 명의 나들. 그 여러 명 중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희미한 누군가를 발견했다.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이다(12, <불안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