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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an 29. 2023

<러브 인 프렌치>, 사랑과 언어에 대한 논픽션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언어학 개론서

 여권을 펼쳐서 내밀자, 여자가 빈 페이지의 흰머리수리 위에 비자를 붙여주었다. 그래도 육지를 향해 다가가는 범선의 모습과 그 위에 적힌 존 폴 존스의 명언은 여전히 또렷이 보였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자들이 결코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냉혹하고도 완고한 자연의 법칙과 같다.” 영사관 직원은 내게 이제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다. 우리는 곧 파리로 떠날 예정이었다.

― <러브 인 프렌치>, 로런 콜린스 지음




 최근 즐겁게 읽은 논픽션, <러브 인 프렌치 - 미국 여자, 프랑스 남자의 두 언어 로맨스>를 소개한다. 저자는 미국인 여성으로, 프랑스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 후 제네바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면서 전혀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에서 책은 시작한다. 책의 도입부는 제네바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 역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지는 저자의 툴툴거림이다. 그러나 곧, 본격적으로 책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프랑스인 남편과의 갈등이 나오는 때부터다.





 이 책은 다른 나라에서 자라온 두 연인과 그들 각각의 가족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언어와 문화간의 관계를 다룬다. 그 모두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마치 톱니바퀴처럼 굴러간다. 그래서 서로 다른 톱니바퀴가 만났을 때, 자칫하면 그 하나하나의 연결부가 모두 틀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미국인다운 미국인—저널리스트라 언어에 민감하고 보수적인 남부 출신—과 프랑스인다운 프랑스인—섬세하고 관계 설정에 신중하한—이 연애할 때 이렇게까지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된다는 사실에 꽤 놀랐다.




 그 갈등은 사소하게는 이런 것들이 있다. 로런의 엄마의는 올리비에가 '아주 특별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칭찬하는데, 프랑스에서는 특별하다는 말은 실은 괴상하다는 뜻의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로런은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밤새 이어지는 것에 경악한다. 다음은 조리대에 기대어 먹는 간단한 미국식 아침식사에 익숙한 로런이 아침에 일어나 포크와 나이프로 식탁을 차리는 것을 보고 당황한 장면이다.



 당황한 나는 가운의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올리비에에게 영어로 물었다.
 “우리가 점심 시간이 다 되도록 늦잠을 잔 거야?”
 그러자 올리비에는 내가 헷갈리고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아침 식사야.”



 이를테면, 둘은 결혼에 이르기까지도 순탄치 않았다. 얼른 결혼을 하고 싶던 책의 저자, 로런(미국인 여자)과 달리 올리비에(프랑스 남자)는 로런을 사랑하고, 가정을 일구고 싶지만 앞으로 어느 나라에 거주하게 될 지의 문제 등 다른 문화권의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어떻게 풀릴지 시간을 들여 알아가고자 했다. 결국 로런은 올리비에를 심각하게 압박하다가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어느날 힘이 하나도 없는 올리비에에게 전화가 한통 오고, 급기야 로런은 당시로서는 예비 시어머니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게 된다. 물론, 불어로. 올리비에는 사전을 들고 하나하나 해독을 시도한다. 차마 사적인 내용을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는 파파고가 없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이 추천서인지, 사형선고 원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결국 나는 독해할 수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분석했다. “votre histoire d’amour”(너희의 사랑이야기), “vous etes complementaires sus tous les plans”(너희는 모든 계획에 서로 보완된다), “il t’aime”(그는 너를 사랑한다.) 일단 여기까지는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Vous etes faits l’un pour l’autre.” 그녀는 이렇게 썼다. “너희는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나는 계속 가보기로 결심했다.



 책의 독자인 나와 둘 사이에 태어난 꿀벌(애칭)로서는 몹시 다행스럽게도, 둘은 결혼한다. 런던에서 살던 둘은 제네바로 거처를 옮기자마자 로런은 사용할 수 없는 언어 장벽 앞에서 완전한 무력감을 느낀다. 로런은 불어 수업을 등록하면서 올리비에와 불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며, 그의 불어 습관을, 영어와 다른 단어 쓰임새의 차이를, 그리고 올리비에 자체를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두 사람의 연애시절부터의 갈등을 읽어나가던 나는 둘 사이에 있던 얇은 장막이 비로소 거둬진 것 같다고 느꼈다.




 한때 나는 올리비에의 과묵함을 비관적 경향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제는 과장되게 말하거나 헛된 약속을 하기 싫어하는 그의 성향이 오히려 희망적이고 더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부’와 ‘튀’의 명확한 구분은 친밀감을 더욱 집약하기 위한 것이다. 마침내 나는 왜 올리비에가 화장한 내 모습을 좋아하는지, 왜 나를 자신의 베스트프렌드라고 부르지 않는지, 왜 내 앞에서는 절대로 트림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은 상대와의 융합이 아니다. ‘주 템Je t’aime’(나는 너를 사랑해)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로런은 언어에 관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그중 하나는 통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1977년 12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정으로 통역가가 아닌 번역가를 구했는데, 지미 카터가 미국을 '떠나온 것'을 영원히 떠나왔다는 뉘앙스로 통역하여 졸지에 지미 카터는 망명한 대통령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 국민들에게 '바란다'고 말한 것을 '성적으로 욕망한다'는 단어로 통역하는 바람에 그 번역가는 즉시 그만두고, 곧 통역가를 새로 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잘못된 통역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이 벌어진 일들이 역사 속에는 적지 않게 있다고 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우리 부부 사이에는 어딘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우리는 마치 라디오 볼륨을 한껏 낮춘 채 듣기라도 하듯, 서로의 말 한 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집중했다.




 <러브 인 프렌치>는 내게 영화 <헤어질 결심>을 생각나게도 했다. 영화에서 서래와 해준은 같은 언어 사용자라면 그러지 않았을 방식으로 서로가 내뱉는 말의 소리, 그 숨겨진 의미, 발화되는 방식에 집중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오히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더 절박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했다. 서로에게 닿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간절하여 지켜보는 관객들조차 숨죽이고 그들의 진의가 무사히 전달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실은 언어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과 노력이 첫째인데, 불편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러한 마음과 노력이 있다면 상대가 구사하는 언어를 배우려는 수고 역시 뒤따르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다.




 평론가 조지 스타이너는 친밀함을 “외적 언어와 내적 언어가 점점 일치하여” 상대와의 일대일 소통이 조금씩 가능해지는 상태, “서로를 확실히 이해하는 준 동시통역” 상태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통역은 언어와 언어 사이, 그리고 같은 언어 내에서도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소통하려면 매번 해석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런은 시험을 봐서 프랑스 비자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책을 쭉 따라 읽어오다보면 로런이 불어를 거의 하지 못하던 때에서 불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문화를 일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동시에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숙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당연시하던 모든 가치를 낯선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덕분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고 귀하면서 대단한 일인지 느끼게 되고, 책을 다 읽을 무렵에는 어서 외국어 하나를 로런 수준으로 연마하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 특히 불어나 영어에 관심있는 사람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유익할 뿐 아니라 진솔하고 유쾌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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