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몸의 언어, 꼬르륵...

by 운곡

雲谷


‘꼬르륵.’

조용한 오후, 책상 밑에서 퍼지는 배고픈 소리. 어린 시절엔 나도, 친구도, 선생님도 할 것 없이 누구나 한 번쯤은 배가 울릴 때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때론 장난처럼 “배시계 울린다!” 하고 놀리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은 늘 다정하게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몸이 우리에게 건네던 가장 소박하고 정직한 신호였다.


그 시절의 배고픔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 끼니를 기다리는 설렘, 엄마가 불러주는 저녁밥 소리에 달려가는 즐거움이었다.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배가 고파야만 음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꼬르록’은 기다림의 언어였고, 기쁨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식탁 위엔 늘 음식이 넘쳐나고, 간식 하나쯤은 언제든 봉지를 뜯을 수 있다. 편리하고 풍족해진 삶 속에서, 배고픔을 참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꼬르록’은 희귀해지고, 배가 울리기도 전에 습관처럼 먹고 또 먹는다. 어느새 몸의 언어는 소음처럼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배고픔의 결핍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잉’이었다. 늘 포만감에 쫓기며 사는 하루. 필요해서가 아니라 눈앞에 있으니 먹고, 무료하니 먹고, 위로받으려 먹는다. 그러다 보니 몸은 감당하지 못하고 병을 호소한다.



비만은 결국 ‘많이 먹어서’라기보다 ‘쉴 새 없이 먹은’ 결과라고 한다. 곱씹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다림 없는 식사, 쉼 없는 섭취가 몸을 피곤하게 만든다.


문득, ‘암(癌)’이라는 한자를 들여다본다. 병 질부(疒) 안에 ‘입’(口) 이 세 개, 그 아래엔 산(山)이 있다. 입 셋이 먹은 음식이 산 만큼 될 때 생기는 병, 곧 과식에서 비롯된 병이라는 해석이 붙는다. 풍요의 산처럼 넘쳐나는 음식이, 오히려 우리를 병들게 하는 아이러니.



그래서 나는 작년 7월경부터 친구들과 걷기 앱을 공유하고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 이후에는 물 한 잔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고, 다음 날 오전 10 시까지 16시간 동안 공복 유지를 한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공복으로 보내는 일이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배 속에서 울려 퍼지는 ‘꼬르륵’이 반갑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잊고 지냈던 몸의 언어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1년 남짓 한 시간 동안 10kg 넘게 체중이 줄었고, 무엇보다 요요 없이 운동과 함께 건강을 지켜낼 수 있었다.


단순히 살이 빠진 것이 아니라, 몸과 대화하는 법을 되찾은 것이었다. 배고픔을 피해야 할 적으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나를 새롭게 빚어가는 가장 소박한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꼬르륵’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이 가장 솔직하게 건네는 대화였고, 스스로를 돌보는 출발점이었다.



돌이켜보니, 배고픔은 결핍이 아니라 ‘기다림의 예술’이었다. 음식과 나 사이에 놓인 그 텅 빈 시간, 허기를 느끼는 순간이야말로 몸이 나를 이해하고, 내가 몸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다시금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풍요 속에서도 몸의 언어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소박하고 정직한 신호에 귀를 기울일 때, 진짜 건강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운곡 김정익

긴 세월의 내공을 껴안고, 삶의 무늬를 또 다른 언어로 그려 내려고 고민합니다. 가슴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지나온 날들의 바람 소리, 잊히지 않는 얼굴들,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물결로 엮어 실개천에 조용히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한 줄 한 줄의 문장들이 바람처럼 스치고, 별빛처럼 가슴깊은 곳에 내려앉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