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2
바이올린을 취미로 배운 지 2년이 되어 가는 지금, 바로 어제 취미반 연주회가 있었다. 나로서는 벌써 세 번째 연주회였다. 관객 한 명 없이 우리끼리만 하는 연주회라 떨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 걸. 달달 떨면서 리허설을 마친 다음 본 연주회 때에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2배속으로 연주를 끝내버리고 무대에서 뛰어내려왔다. 얼마나 떨었느냐면 연주하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있기가 힘들 정도.
첫 번째 연주회 때에도 떨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더 떨었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서 심리학 섹션을 돌아다녔다. 불안과 우울을 다루는 책은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떨림증’을 언급한 책은 <때로는 떨려도 괜찮아>가 유일했다. 검색 없이 내가 찾던 책을 찾아내는 소소한 기쁨! 당장 대출해서 카페로 뛰어갔다. 어제의 나는 뭐가 그렇게 떨렸을까?
<때로는 떨려도 괜찮아>는 전체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상황, 대화나 발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타게팅한 책이다. 저자는 사회 불안 자조 모임인 ‘이미 아름다운 당신’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나누었던 경험과 지혜가 책 안에 빼곡히 담겨있다. 다정함도 물론.
우선 1장에서 ‘떨림증’이라는 가벼워 보이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 주고, 떨림증이 생기는 다양한 원인에 대해 소개해준다. 그다음으로는 떨림증 모임에서 나누었던 경험들을 나누고, 떨림증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비법들을 잔뜩 소개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배우와 작가, 음악감독들이 떨림증을 극복한 비법을 공유하며 마친다.
처음부터 ‘대인기피증’이나 ‘사회불안장애’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작가의 말부터 굉장한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책을 여럿 읽어봤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학 용어 사용을 지양하려는 심리학 책은 처음이었다. 독자들이 오히려 그 병증에 깊게 몰입하게 될까 봐 떨림증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수많은 떨림증이 있고 저마다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사실 그 뿌리는 같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내 모습을 어떻게 볼까’를 걱정하면서 몸이 긴장하고, 그 결과 다양한 신체 증상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떨림증에 대한 설명은 사실 우리가 이미 겪고 있는 증상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 게 그걸 막연한 느낌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전문가가 정확한 워딩으로 설명해 주었을 때가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떨림증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왜 통제가 안되지?”에서 “통제가 안될 수밖에 없는 증상이었네!”로 바뀌었다.
언급된 경험과 노하우가 엄청 많지만, 내가 찍어둔 조언 몇 가지를 미리 공유한다.
떠는 것을 긴장이나 움츠러듦, 위축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석하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떨림이 흥분 증상임을 알게 된 지금은 조금 긍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어린아이가 되어 나에게 질문해 본다. 내가 떨리는 이유가 뭘까? 지금 제일 걱정되는 것이 뭐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내가 진짜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본다.
연주회 전에 내가 뭘 걱정하는 건지 노트에 적어보았다. 아마 나는 내 재능 없음을 사람들이 눈치채고 비웃을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너 시간 낭비 하고 있네! 하고.
멈추고-풀고-연다의 줄임말이다. 영어로는 Pause-Relax-Open (PRO) 명상법이라고 한다.
긴장되는 순간에 긴장한다는 생각을 멈춘다. 머릿속으로 ‘잠깐!’이라고 소리 내보는 것도 방법이다.
멈춘 다음엔, 바로 푸는 과정으로 진입한다. 4~6초간 깊은 호흡을 하되, 들숨보다 날숨을 더 길게 뱉는다. 이완된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 포인트.
숨을 다 쉬고 나면 바로 다시 긴장 상태에 돌입하게 되어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감각을 여는 단계가 있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5가지 중 하나를 골라 감각에 집중하자. 긴장=생각이고, 감각=이완이라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우리의 뇌는 한 번에 두 가지를 모두 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으니, 감각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긴장이 완화된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다소 추상적이었는데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어서 찍어두었다. ‘눈 감고 그리기’, ‘안 쓰는 손으로 그리기’ 등 잘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미술 치료법이다. 점차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지니 자신감을 갖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내일은 바이올린을 반대 손으로 켜볼까?)
걱정을 유연하게 만드는 삐딱이를 소환하여 반문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떨림증이 있다기보다 걱정을 하기 때문에 떤다. 병이 있어 계속 떠는 것이 아니라 전에 떨었던 기억 때문에 걱정하느라 또 떠는 것이다. 떨림증이 있는 사람이 자는 것을 깨워서 엉겁결에 뭔가를 시키면 떨지 않고 해낸다는 문장을 보고 아차 싶었다. 맞네. 자다 일어나면 뭘 해도 떨리지 않는다. 엉겁결에 아무 생각도 없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걱정을 좀 더 유연하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책에 나온 반문법과 가능성이 포함된 진술로 바꾸기 예제는 이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해야 한다 → 장황하거나 두서없으면 안 돼?’
‘우울해 보이니까 나랑 있는 게 불편할 거야 → 우울해서 코드가 맞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예제를 토대로 내 걱정도 반문해 보았다.
연주를 실수 없이 해내야 한다 → 실수 좀 하면 안 돼?
실수하면 선생님이 실망할 거야 → 오히려 더 잘 가르쳐주려고 하시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자신감 관련 파트에서 뜨끔하게 하는 지적이 있어서 저장했다.
어떤 셀프 토킹들은 자신감을 줄이는 데 영향을 준다. 바로 ‘~한 것 같아요’ ‘좀’ ‘약간’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단어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고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나는 ‘약간’이라는 말을 무진장 많이 쓴다. 그게 내 자신감에 영향을 주는 입버릇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런 사소한 습관이 떨림증 극복과 연관이 있다니! 심리학의 세계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오늘도 큰 건 하나 배웠다.
책을 읽으며 노하우들을 따라 해보면서, 내 마음속 가장 깊은 문제는 타인을 실망시키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는데, 마지막 멘토들의 경험담 부분에서 너무 좋은 조언을 얻었다.
엄마에게 나쁜 아들이 되면 안 되니까, 하기 싫어도 해야 하니까. 그런 게 사람을 괴롭게 하고,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해요. 그런데 여행을 통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거예요. 전에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거든요. 자신을 위해서 (타인에게) 나빠질 수도 있어야 해요. 그게 자신감을 키우는 길이죠.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딸이었다. “집에 부모님이 없을 땐 네가 엄마야. 네가 가장이야.”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고 그게 당연한 나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고 지금도 어렵다.
하지만 연주회에서의 떨림증을 생각해 보면, 내 취미생활에서 만큼은 다른 누구를 실망 좀 시켜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왜 그동안 이 생각을 못했을까? 이거 원,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사람이었나 보다. (방금 이 문장을 3번이나 고쳐 썼다. ‘약간’, ‘좀’, ‘~같다’라는 말을 한 번에 다 썼다.) 동시에 좀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었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