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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Sep 08.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만약은 없다

23.07.16


‘죽음' 하면 너무 많은 말이 떠오른다. 미치도록 갈망하던 안락한 죽음, 죽음 그 이후의 세계, 남길 것들과 남아 버릴 사람들, 동물들, 허공으로 흩어질 나의 향유들. 그러나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희미한 망상에 불과하다.


죽음은 언제나 그랬다. 가장 서럽게 울었던 죽음의 장면도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도 언제나 그것을 관망하는 나와 뚜렷한 거리감을 과시했다. 예컨대 그 어떤 죽음도 나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만약은 없다>는 응급실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기록이다. 더 정확히는 응급실에서 만나는 상황들이다. (죽음이라고 적고 싶지만 두 번째 챕터에서는 죽음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조금 오래된 책이라 지금의 사회 분위기랑 안 맞는 얘기들은 좀 있었다.


책은 총 두 개의 장으로, 죽음에 관한 첫 번째 장과 삶에 관한 두 번째 장으로 단순하게 나뉘어있다. 두 장의 분위기가 몹시 다르다. 어둑한 밤을 배경으로 진행되던 연극이 커튼을 닫았다가, 짜란, 해가 뜬 다음 날 아침 햇살을 보여주며 커튼을 열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죽음에 관한 챕터를 왜 앞에 배치했는지 알 것도 같다.




당연히 죽음을 다루는 첫 번째 장은 어둡다. 음울하고, 지나치게 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29개의 이야기 중에 죽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들은 이미 죽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죽음을 열거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자 역시 아직은 살아있기에 열거된 모든 죽음은 타인의 것(혹은 가상의 것)이고,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받고 말았다. 왜 내가 상처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죽음이 갈기갈기 찢겨 예쁜 그릇에 담겨 나왔고, 나는 양손에 나이프만 두 개를 든 채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추락을 선택한 남성, 양 손목과 발목과 목을 긋고도 죽지 못한 남성, 연인에게 폭행당해 죽은 여성, 가족들과 식사하다 기도가 막혀 실신한 뒤로 발작을 이어가다 죽은 여성…


이 모든 죽음은 지나치게 날것이었고 그래서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은 죽음이 아닌, 죽음을 목격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향해 흘렀다. 나는 또다시 묻는다. 이 모든 죽음을 열거하는 이유가 뭐예요. 1장은 온통 질문으로 끝났다.


어쩌면 이 모든 죽음의 열거로 응급실을 묘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그가 얼마나 쉴 틈 없이 일하는지가 자주 언급된다. 또 그는 거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수면 부족이다.


죽음은 일일이 묵념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불규칙하게, 그러나 연속적으로 응급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죽음이 이토록 넘쳐나는 상황에서 무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그러나 우리는 또한 쏟아지는 죽음 중 아주 일부만을 읽었기 때문에, 그의 무뎌진 감각을 미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 무딤을 마냥 미워할 자격이 없다. 무뎌짐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서글픈 사실에 지견 한 것이다.


내가 무뎌진 것은 데이트 폭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책 속에서 당장 기억나는 사망과 상해가 세 건이다. 모두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가해한 폭력에 의한 죽음(또는 상해)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안타깝다고 여기며 페이지를 읽어 넘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깜짝 놀라 페이지를 다시 되돌렸다. 폭행당해 죽은 여성 위에 엎어져 울며 인공호흡을 시도하는 남자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참지 못하고 쯧, 혀를 찼다. (살인범은 추악한 것은 당연하고) 나 역시 어떤 종류의 죽음에 무뎌지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처참했다. 그리고 그제야 저자의 무뎌진 감각을 마냥 미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야기 속 죽음은 매혹적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죽은 요정들은 별자리가 된다. 아폴론에게 잘못 보이면 꽃이 되고 별자리가 되고 하여간 그렇다. 그래서 신화겠지. 어느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 다루는 죽음은 잔혹한 미스터리다. 영화에서의 죽음은, 소설 속 죽음은, 노래 가사 속 죽음은…..


미적 기준을 충족한 만족스러운 죽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만약은 없다>는 지나치게 날카롭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공한 글이라고 해도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죽음을 다루기 때문이다. 또 병원이라는 공간적 배경도 날이 선 감각에 한몫 보탠다.


그러니까, 아무리 스테이크를 좋아한다고 해도 도축 과정을 보며 즐거울 수는 없다. 이 책은 거의 그런 느낌이다. 내가 아무리 추리 스릴러 소설을 좋아해도, 괴짜 천재가 나오는 의학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해도, 니체가 말하는 죽음의 정의에 제 아무리 공감하는 척 해도, 진짜 죽음이 생생히 묘사된 이 책을 읽는 것은 솔직히 힘들었다.




이쯤에서 두 번째 장, 삶을 다루는 챕터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한번 더 언급하고 싶다. 전혀 힘들지 않다.


앞서 죽음을 다룬 챕터가 무거웠던 만큼 두 번째 챕터에서는 삶의 희망을 다루길 바랐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삶에 대하여’라기보다는, 응급실을 배경으로 한 시트콤 시나리오북 같달까. 큰 고민이나 생각의 결 없이 그냥 쭉 읽으면 되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한 사람이 겪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경의가 느껴진다. 지금은 그가 충분한 잠을 자고 있길 바란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 모두의 처우가 개선되기를 동시에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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