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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 이부장 Jul 15. 2024

07... 안정적인 이직은 없다.

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07


집무실로 들어간 나는 다소 상기된 표정의 옹상무를 만났다. 뭔지 모를 궁금함과 짜증이 동시에 마음을 점령했다. 나의 이동에 대한 진중하지 못한 어떤 제안에도 스스로 혈압을 올려 건강을 해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이팀장, 계열사에서 사람을 구한다는데 생각 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옹상무의 눈을 응시했다. 초점 없는 눈은 어떤 꿍꿍인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예상밖의 질문으로 혼란에 빠진 나는 바로 답변을 못했다. 다만, 친구 녀석에게 이력서를 보내면서 이미 이직을 각오한 터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유일한 관심은 옹상무의 상기한 듯한 얼굴이었다.  왜일까 궁금했다. 아니, 불안했다.

  
"어떤 회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P사라고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데, 물류 하는 회사일걸...., 사업부 전략 자리래".


내가 동의하면, 인사팀한테 연락이 올 것이고, 상세내용은 인사팀을 통해 들으라 했다. 옹상무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도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바보 같은 사실에 나 자신에게 또 한 번 화가 났다.

면팀장 통보를 받고, 미련스레 한 달을 넘게 버티다 보니, 이런 기회도 오는구나 싶었다. 옹상무의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보아, 오히려 나한테 좋은 조건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열사 전배는 대기업의 장점을 활용하여 안정적으로 이직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간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기회인가? 아니면, 특정 자리에 추천으로 가는 걸까?' 승진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고, 연봉은 어떤 직책이냐에 따라 달라질 터였다. 다만, 나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곳인지 선명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물류라는 것은 나에겐 피를 말려가며 개발하고, 치열하게 원자재를 수급해서, 수고스럽게 만든 제품을 계약된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저 비용으로만 바라보았던 영역이었다. 만약, 이직을 하게 된다면, 업에 대한 본질을 모르고, 지인 한 명 없는 낯선 곳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혹시나 옹상무가 계획한 ‘독이 든 성배‘ 는 아닐까?, 상기된 얼굴은 이런 의미였을까?


제한된 정보 탓에 쉽게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먼저 손을 든 사람에게 기회가 가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었다. 빠른 시간 내에 결정은 필요해 보였다. 미리 고민했던 옵션은 아니나,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볼까?


한걸음에 인사담당님을 만났다. M&A팀 시절, 함께 현장실사(Due diligence)를 다녔던 분이었다. 옹상무가 언급했던 계열사 요청의 실체는 이랬다. 비상장인 P사는 그룹오너일가의 지분이 많은 회사이고,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이라 지주회사에서 정기적을 챙기고 있는데, 현재, 해당 보직에 있는 사람이 기업공개 등의 업무에 경험이 없어 윗분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해서 해당 회사에서 계열사로 인원요청을 했고, 첫 번째가 우리 회사라는 것이다. 직책은 실장급으로 산하에 기획팀과 전략팀이 있다고 했다. 급여는 계열사 전배이므로 슬라이딩(현재 처우를 그대로 적용)이라 했다. 승진에 따른 직책수당이 추가되고, 퇴직금도 원하면 승계할 수 있다고 했다.


업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생면부지의 곳으로 이동이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두운 표정을 본 인사담당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한마디 거든다.


"전임자가 또라이 라던데… 고집도 세고, 윗분들 지시도 잘 따르지 않는 독불장군이래. 이팀장이 여기처럼만 하면 금방 적응할 수 있고, 일 잘한다는 소리 들을 수 있을 거야...."


여기처럼만 한다고?...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대기업군에 속하는 회사가 있다. 새로이 사업을 확장하면서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전임자가 있다고 했다. 사업부라고는 하지만, 기획실장에 있는 사람이 또라이라면, 인사 시스템이 비정상이거나, 아니면 유능했던 사람이 이렇게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현직책자를 경질시키고 내부승진을 시키려고 했으나, 전임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는 후배들이 그 자리에 앉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로 눈을 돌려 계열사 중에 '실장'자리에 욕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을 찾고 있다면, 만약에.... 만약에 그런 것이라면, 나는 여기에 지원하는 것이 맞을까?


그나마 지금은 적이 있지만, 우군도 있다. 업에 대한 이해도 높다. 무엇보다도 쓰임이 있다. 그래서 자존심을 버리면, 쓰임대로 살면서 구질구질하지만 연명은 가능하다. 20년의 경험과 네트워크가 그 정도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만약 P사에 이직을 해서 전임자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수개월만에 일어난다면, 나는 지금보다 잘 대응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친구 녀석에게 이직을 각오하고 이력서를 보낸 이유는 뭐였지? 자존심하나 버리지 못해서가 아닐까? P사는 현직장보다 그룹 내 위상이 낮은 회사지만, 이직하면, 조직책임자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고, 팀장보다 높은 실장이 되는 것이니 승진도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옹상무의 정치놀음이 역겹고, 그 때문에 비루해진 내 모습을 못 견뎌 친구 녀석이 다니는 회사에도 이력서를 보냈는데, 옵션하나 추가 한다 생각하면 어떨까? 아직 합격한 것도 아닌데...


평소에 정의롭고, 따뜻하다 생각했던 분의 조언이라 신뢰가 가면서도, 이렇게 몰리고 있는 상황에 누구 하나 믿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처지를 자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현재 직장에서는 승진은커녕, 자리보전도 못하게 되었으니 옵션을 만들고 기회를 잡아야 했다. 얼마나 더 받는다고 승진 따위에 연연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이게 자존심이고, 가족에 대한 예의라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은 밥 먹듯 하면서 승진이라도 해야 면이 섰고, 이유가 되는 거였다.


자매사 이동도 기회인데, 다른 사람 아닌 나에게 먼저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결론짓고, 지원하기로 했다. 몇 시간 후, 인사팀을 통해 들은 이야기는 P사에서 1주 후, 면접을 진행한다고 했다. 타계열사에서도 지원자 있는 것 같다고... 면접관은 여러 명이 나올 예정이고, 해당 시간에는 나 혼자 면접을 보게 될 것이라도 했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고, 물류영역이 이렇게 까지 관심을 받을 거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옹상무를 찾아 인사팀과 나눈 이야기를 전달했고, 면접일은 휴가를 내겠다 했다.


바로 면접 준비를 했다. P사 정보를 금융감독원 서비스(DART)의 재무정보부터 확인했다. 매출은 현재 회사의 25% 수준의 회사. 이익률은 낮지만 기복이 없고, 적자가 난 적은 없는 회사였다. 나쁘지 않았다. 외형적인 특징은 어느 정도 확인을 했지만, 조직구조나 주요 이슈들은 알 수 있다면, 계열사 전배를 위한 면접 특성상 성의라도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결심한 거라면, 잘하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제법 가까운 지인이 P사로 이동했다가 임원을 달고 지주회사로 복귀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 오랜만입니다. 제가 P사에서 전배요청을 받아서 면접을 보기로 했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어, 이팀장, 오랜만이네... 내 요새 한가하다. 함 놀러 온나..."


다행히 한가하다 했다. 수첩하나 들고 만나러 갔다. 보고하러만 왔던 곳인데, 이렇게 개인적인 목적으로 방문할 일이 있을 줄 몰랐다. 긴장하며 왔을 땐 보이지 않았던 사무실 풍경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선배는 편안 복장으로 출근해 있었다. 얼마 전, 특정 계열사의 진단을 마쳤고, 지금은 잠시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했다. 임원이 된 선배는 예전에 비해 턱선이 후덕해지고, 여유로워 보였다. 부러웠다.


선배는 P사의 조직도, 지배구조, 정치구도 등을 시간을 드려 설명해 주었다. 덤으로 P사가 지주회사로 제출했던 여러 보고자료의 인쇄본도 보여주었다. 생소한 용어와 표현들로 인해 정확한 이해는 어려웠지만, 몇 해 동안 유사한 내용이 반복된 보고서는 전략에 대한 실행력이 부족하거나, 할 수 없는 전략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면접할 때, 이런 질문은 하지 않겠지....


1주일은 빨리 지났다. 복장은 비즈니스 캐주얼이라 했지만, 조금 더 단정한 이미지를 주고자 진한 남색 정장에 흰색 셔츠, 그리고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기본적인 재무수치를 외우고, 여유 있게 출발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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