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08
눈 때문에 일찍 출발한 탓일까 면접장소에는 약속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의도했던 상황이나, 면접 전에 시간을 보낼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처음 와보는 건물이지만, 카페는 있을 것 같았다. 큰 노력 없이 프랜차이즈 카페를 발견했고, 시간 여유가 있기에 모닝세트를 주문했다. 따뜻한 커피와 파니니가 나왔다. 혼자 머릿속으로 면접을 시뮬레이션하면서, 천천히 불편한 여유를 즐겼다. 짭조름하게 맛있었던 파니니를 다 먹고도 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뱃속은 든든해지고, 머리는 복잡해졌다.
식어버린 커피를 더 홀짝대는 것도 궁상스러운 것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전에 통화했었던 P사 인사팀 차장께 연락했다. 예상보다 먼저 온 것이 당황스러운 눈치다. 상기된 표정으로 면접장소로 안내했다. 함박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과 동일하게 흰색 대형 테이블이 있는 큰 회의실로 데려갔다. 날씨 이야기와 함께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었다. 면접이라기보다는 티타임 형식으로 진행 예정이니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CFO, CHO, K사업부장 이렇게 3명을 뵐 예정이고, 시간은 대략 한 시간 전후가 되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잠시 후, 티타임으로 위장된 면접이 시작되었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나 혼자였고, 면접관들로 나온 임원분들은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으로 나를 맞이했다. 계열사 전배여서 인지, 면접관들께서는 각자 아시는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고, 그중 내가 아는 몇 분 들의 근황을 답변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했다. 현재 직장에서의 수행했던 주요 업무와 성과 등을 궁금해했고, 정량화한 숫자로 듣길 원하는 질문이 많았다. 특히, 그룹 내 주력회사에서 작은 회사로 아니, 정확히는 갑의 위치에서 을의 위치로 왜 이직을 하려는지 궁금해했다. 이력만으로는 핵심부서에서 팀장을 하고 있는데, 이직을 원한다는 것이 의아했을 것이고,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채용한다면, 오랫동안 다닐 마음이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었다.
면접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면접을 잘 치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단순한 승부욕보다는 위기감이 더 적확한 표현일터였다. 회사가 비전이 있고 좋아서라기 보단 이 면접이 나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선이라 생각되었다. 만약 추천을 통해 성사된 자매사 전배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나는 시장에서 더 이상 가치가 없어진 사람이고, 회사를 떠날 경우 밥값을 못하는, 객관적으로 그저 그런 'One of them' 중 하나로 전락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나를 이리 함부로 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고,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바뀌어 있는 나의 입지를 인정해야 될 것 같았다. 나는 나만 몰랐던 루저(Loser)였음을 인정하라 강요당하는 기분이랄까? 정신 차리고 실수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다. 하루아침에 팀장 자리를 내놓게 된 내 상황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은 정직할 순 있어도 최소한 지금의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채용하기 위해 납득할 만한 스토리가 필요했다. 미리 준비한 몇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답했다.
'혼이 담긴 구라?'
영화 타짜에서 본 장면이 떠 올랐다.
"회사에 CEO직속 및 3개 사업부를 포함 Staff부서의 팀장이 12명 있습니다. 제가 11번째입니다."
"Staff부서에서 20년을 일하면서 이름만 말해도 다 아시는 4명의 부회장님을 상관으로 모셨고, 첫 보직을 전사 기획팀장으로 데뷔했습니다."
"저랑 같이 일하시는 팀장님들 대부분이 발탁되고 특진도 한 분들입니다. 회사 초기 때부터 계신 분들이라 조직 장악력도 나무랄 것 없고, 리더십도 훌륭해서 후배들에게도 존경받고 있습니다."
"제가 팀장을 단 지 4년째인데, 선배 팀장님들 단 한분도 임원 또는 담당으로 승진된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사업환경이 어려워지면서 인사적체가 시작되었고, 길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십여 명의 Staff 팀장 중 거의 막내인 제가 유일하게 M&A경험을 갖고 있다 보니, 면접의 기회를 얻은 것 같습니다."
석연치 않은 표정과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한마디가 이어졌다.
"Staff 팀장이 12명이라 잖아...."
CFO께서 분위기를 잡아 주신 덕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고비는 K사업부장이었다. 아마도 직속상사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지원하려는 회사의 업의 본질인 물류업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 성과를 낼 것인가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다행히 사전에 파악한 정보 중에 그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그도 몇 해 전, 계열사에서 전배를 왔고, 물류를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사업의 성과를 보여 전무 승진까지 했고, 성과에 대한 욕심이 특히 많은 사람이라 했다. 아마도 자신을 더 승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거라 했다.
업무전문성을 증명하라는 집요한 질문에 어설프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면접 전에 인사팀을 통해 미리 전달된 나의 프로파일을 봤을 것이고, 그럼에도 면접을 보자고 했던 것은 물류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이 면접의 합격여부를 결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솔직하고 당돌하게 답하기로 했다. 나는 물류는 잘 모른다. 다만, 내가 해야 하는 업무는 사업부의 전략과 기획업무이다. 업종에 따라 특이점이 있고, 호흡은 다르겠지만, 오랫동안 기획과 전략업무를 해 온 만큼 적어도 기본틀은 갖췄고, 역할도 잘 이해하고 있음과 특히 일반적인 Staff들이 경험하지 못한 5년여의 M&A경험도 갖고 있는 만큼 상장을 준비하는 P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어필했다.
면접은 예정된 시간보다 20분을 초과해서 마쳤다. K사업부장은 계속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길 원했고, 옆에 계신 CFO의 만류로 가까스로 면접이 종료되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면접관들을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스스를 설득하고 다독였던 비물류전문가 프레임이 맘에 걸렸다. 정말 물류전문가를 원했다면, 서류심사에서 걸러도 되는 상황이었다. 굳이 면접까지 한 것은 최소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이상하리만큼 집착을 보인 K사업부장의 태도는 어쩌면 내가 유일한 후보 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자고 자위하며, 면접 장소를 나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에 진이 빠진 듯 힘이 들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건물 내 있는 카페에 다시 들려, 달달한 라테를 한 잔 사들고 회사를 나왔다. 사원증을 보여주면 20%를 할인해 준다는 혜택은 받지 못했다.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우중충한 날씨가 내 착잡한 마음과 같았다. 잘 될까?
불안한 맘이 큰 탓일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얼마 전 송부한 이력서에 대해 물었다. 여러 후보자가 있고, 아직 심사를 시작하지 않고 있다 했다. 너스레를 떨며, 기세 등등 했던 모습과는 다른 반응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역시 고용인은 임원이 되어서도 노동자 계급인가 보다. 내가 너무 과신한 것은 아닐까? 임원이 이렇게 쉽게 될 것이라면, 선망이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나를 다독였다. 아직은 백수가 아니고, 이직은 진행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