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이야기... Part09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 아파트 입구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정장을 입고 출근하는 일은 가끔 중요한 보고 때마다 있어 왔으니 특이한 일은 아니다. 다만, 점심도 먹기 전에 퇴근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대로 귀가를 하려면, 몹시 아프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아내는 내가 오늘 면접을 보는지 모르고 있었다.
차를 돌려 Coex Mall(코엑스몰)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하동관에 들려 설렁탕을 점심으로 먹고, 서점 매대에서 인기 있다는 책도 몇 권 들쳐 보았다. 별마당도서관에서 인테리어 잡지도 뒤적거렸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할 수 없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도 한편 봤다. 이제야 짧은 늦겨울 해가 지고 있었다. 영화관람 덕에 주차 할인을 받긴 했지만, 한나절을 지낸 탓에 제법 많은 주차비를 정산하고 나왔다. 그래도 평소보다 여전히 빠른 귀가시간 탓에 아내에게는 보고 마치고 피곤해서 칼 퇴근 했노라며 너스레를 떨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주변 팀장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출근했다. 어제 면접은 당연한 비밀이다. 갑작스러운 휴가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팀장들에게는 본가에 일이 생겨 다녀왔다고 둘러 대었다. 이미 옹상무가 이야기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P사로부터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궁금해하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 식사 후, 옹상무의 호출이 있었다. 역시나 면접 결과를 물었다.
"연락 왔나?"
"인사팀을 통해 통보해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옹상무의 의중은 이랬다. 후임자로 선정된 용책임이 이미 팀에 와 있으니, 팀장 발령을 내줘야 하는데, 그걸 언제로 해야 할지, 내가 언제 자리를 비울 건지에 대한 채근이었다.
"혹시, 합격에 차질을 줄 수도 있으니, 통보가 올 때까지 며칠만 발령을 미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20여 년의 인연에 대한 배려를 바라며, 매달리듯 부탁하는 내가 비루해 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간절함이 앞섰다. 체면을 따질 여유나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옹상무는 의외로 별 이견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서일까, 골초인 옹상무는 야외에 마련된 흡연구역에 갈 때마다 나를 찾았다. 나는 흡연을 하지 않았다. 입사 후,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아직은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고, 좁은 공간에서 피는 연초냄새는 잠시 머무는 순간만으로도 머리와 옷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전자담배가 대세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옹상무는 연초를 고집했고, 냄새가 강했다. 불쾌했고, 가고 싶지 않았다. 옹상무는 날 억지로 끌고 갈 때마다 P사에서 연락이 왜 안 오냐며 채근하듯 물었고, 불편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비 좁은 캐노피(Canopy) 아래에서 냄새에 베어가며 장승처럼 서 있다 오기를 반복했다. 이런 사람도 승진해서 임원생활을 길게 하고 있는데, 나는 왜?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싫은 내색도 못하고, 억지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이 더 싫었다.
나의 일상은 여전히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재무수치를 만들어 보고를 위한 Data를 제공했다. 면접 후, 여러 날이 지났다. 옹상무는 이제 대놓고 면접에 떨어진 것 아니냐 물었다. 합격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일이 이쯤 되자 진짜 떨어진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면팀장 통보받고, 팀원 자격으로 이미 논의된 팀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닌지 눈치가 보였다. 연락이 없는 P사가 야속했다. 떨어졌다면, 빨리 알려주지. 다른 옵션 준비라도 할 건데, 이도저도 못하게 붙들고 있게 하는 행태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우리 인사팀을 통해 P사 면접결과를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팀장님, 궁금하시겠지만, 물어보면 보채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으니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야속하게 들렸다. 남의 일이라 무신경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격지심이 넘친 탓에 인사팀 담당자가 말사이에 넣는 숨소리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는데..."로 시작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임을 직감했다. 오너(Owner) 3세 체제로 재편하고 있는 회사는 녀석 이외의 인원들은 녀석보다 10살 이상 어린 오너 3세와 비슷한 연배로 구성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나 내가 지원한 자리는 곳간관리를 하는 역할이라 오너 3세의 지인으로 정해 질 것 같다는 회사 분위기를 전했다. 면팀장 통보 때문에 회사는 옮기지만, 생각지 않았던 임원이 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기대는 어림없는 환상으로 끝났다. 난 뭘 믿고 이리 준비 없이 살았을까? 회사에 올인하며, 살아온 삶은 옳지 않은 선택이 되었다. 헤드헌터에게 지금이라도 이력서를 보내야 할까? 이제라도 이직을 위한 앱(App)에 올려볼까?
한숨을 쉬고 있는 나에게 옆팀 최팀장이 말을 건넸다. 그는 자매사에서 전입해서 나보다 먼저 팀장을 달았고, 나이도 서너 살 많았지만, 여전히 팀장이었다. 중요한 보고가 있어도 보고 전날에만 야근을 했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잘 넘기는 모습에, 나는 건방지게도 그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무슨 고민 있나?"
경상도 출신의 그는 투박하게 물었다. 이미 옹상무를 통해 대강의 이야기는 알고 있는 듯했다. 휴게공간으로 자리를 옮겨서 면접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K사업부장의 이름을 물었고, 이전직장에서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다 했다. 잘 될 것이라며 따뜻한 말을 건넸다.
사실 그도 옹상무로부터 팀장을 내놓고, 자리를 옮기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나와는 다르게 그는 OO공사에 경력자 채용 시험 준비를 하고 있고, 미리 이직을 고민해 왔다고 했다. 다른 옵션으로 능률협회에서 운영하는 "경영지도사" 준비도 하고 있다고 했다. 옹상무 압박 때문이 아니라 인사적체를 느낀 후부터 꾸준히 준비해 왔었다고 했다. 그래서 야근이 필요해도 후배들에게 업무를 일임하며, 자신을 챙기고 있었다고...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니 영어시험도 꾸준히 보면서 이직에 대비해 왔다고 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는 미련하게 회사에 충성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다고 했다. 임원을 먼저 하려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리될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옹상무에게 아무 해외법인이라도 좋으니 회사 생활의 마지막을 법인 관리담당으로 보낼 수 있도록 보내 달라고 제안했다고 했다. 국내에 비해 월급이 많은 주재원 생활로 몇 푼이라도 더 받아서 퇴직을 준비하려고 한다는 계획도 말해 주었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나는 왜 안 했을까? 결국, 가장 무방비로 생활했던 것은 나였다. 챙겨 줄 사람 하나 없었는데, 자만에 차서 살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벼랑 끝에 서 있는 꼴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마치며 일어서는데, 그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사람한테는 말했나?
미처 생각지 못하기도 했지만, 자랑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 언제부터 아내에게 나의 회사생활에 대해 공유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 장인어른을 닮아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성향도 한몫했지만, (내 기준에서) 그리 특별함이 없는 회사생활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소소한 생각을 나누던 기쁨은 무뎌졌고, 정서적인 교류가 뜸해지면서 뜬금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 왠지 겸연쩍기까지 했다. 그렇다 보니 뭔가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물론, 속상한 일이 있어 대화 상대가 필요한 상황은 있었다. 다만, 영혼까지 지쳐 퇴근한 상황에서 아내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누려면, 그동안의 히스토리를 먼저 설명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말하면서 다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내도 지루한 사전설명을 다 듣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좋지 않은 일은 혼자 삼켰고, 삶의 많은 부분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대치동 키즈답게 짜여진 교육에 집중했고, 아내는 아이의 학원 및 진학에 관련된 주제만을, 나는 해외출장으로 집을 며칠 비워야 하거나 승진으로 월급이 달라지는 상황 정도를 공유해 왔다.
"면접까지 보고 왔으면, 이직할 수도 있다는 거 아이가? 그래도 집사람인데, 결과 나오고 통보하면 서운해 한데이....".
그럴까? 아내는 멀쩡히 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생소한 회사로 이직하려 하는 내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중에 결과만 공유하고, 그리 되었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라고 털어놓아도 될까? 나는 담담히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내 거취문제에 집중하느라 함께 사는 사람을 잊고 있었다.
아 차... 나는 가족보다 회사에만 최선을 다하고 살았구나. 그러다 이리 배신을 당하니,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는구나...
갑자기 삶이 애달프고, 이런 내가 불쌍해서 서러움이 북바쳤다.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한강에 비친 야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