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06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옹상무가 주관하는 주간(Weekly) 회의로 하루를 시작했다. 팀장들만 그의 집무실에 모여 지난주에 일어난 던 일 중, 주요 사항을 공유하고 금주에 할 일 들을 일자별로 보고했다.
회의 후, 어제 못다 쓴 이력서를 완성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외장하드에 저장된 과거 자료를 확인했다. 회사는 개인 PC의 사용년수를 정해 놓고 그 기간을 채워야 교체를 허락했다. 교체하면서 주요 보고서나 이메일은 옮겼다. 늘 Data에 치여 살았고, 회사 생활도 20년이 넘다보니, 어느 순간 PC저장용량 보다도 많은 자료를 들고 있게 되었다. 요즘은 클라우드(Cloud)로 관리하는 회사가 많아졌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10년이 넘는 자료들은 특별히 승인받은 외장하드를 구입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별도의 관리번호를 부착하고, 회사 내 자산으로 등록한 뒤, 나름의 기록들을 보관했다. 어느 순간 중요한 파일을 날려 버리기도 하고, 오판으로 회사의 유일한 자료를 삭제하기도 했지만, 회사 역사의 기록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연도별로 정리된 폴더를 보면서 기억을 더듬어 지원하고자 하는 포지션을 위해 호소하고 싶은 내용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찾고 적었다. 경영기획팀장으로서 임원평가 항목에 장기평가(그래봤자 3년이지만) 항목을 30% 비중으로 추가했던 일, 업의 본질이 다른 사업을 분리해서 새로운 평가기준으로 적용했던 일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가장 분량이 많은 부분은 아무래도 M&A영역이었다. 그중에서도 신규사업을 위해 원천특허를 매입, 경쟁사가 선점한 영역에 특허소송 없이 진입 가능한 입지를 만들고, 자재공급망을 구축했던 일도 기재했다. 인수나 매각 건들은 목적과 거래규모 등을 병기했다. 업무시간 틈틈이 정리하고 수정하기를 반복, 금요일쯤엔 5Page의 이력서를 만들 수 있었다. 밀린 숙제를 마친 기분이랄까? 개인의 역사를 정리한 듯 뿌듯함까지 느꼈다.
성취감도 잠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를 인식했다. 공들여 쓴 이력서를 녀석에게 이메일로 송부를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지급된 PC는 외부 이메일은 읽을 수는 있지만, 발송은 안되도록 보안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휴대폰은 출근과 동시에 사진 촬영이나 녹음 기능이 차단되었기에 이 역시도 불가능했다. 또한 최근 퇴사자들이 회사 기밀자료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유출하다 발각되는 일이 있은 후로는 인쇄용 종이에도 특수 재료를 넣은 제품만을 쓰기 시작했고, 퇴근 시 보안 게이트를 통과할 때, 검색이 되도록 되어 있어 인쇄해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방법은 하나, 이력서 파일을 열어 놓고, 업무용 수첩에 적었다. 야근이 일상이므로 저녁에 남아 있는 나를 수상히 보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은 이력서에 사진을 넣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사진을 넣는 이력서가 일반적이었다. 주말을 이용해 이력서 제출용 사진도 찍었다. 날카로운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서 턱선을 살짝 수정해 달라 부탁도 했다. 일요일 저녁, 이렇게 작성된 이력서를 집에서 개인 노트북으로 발송했다. 메일 전문에는 퇴사를 하게 된 이유와 새로운 회사에 지원하려는 동기를 함께 적어 보낸 후, 녀석에게 톡을 보냈다.
"이력서 보냈다. 고민 많이 하고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니, 회사에 잘 어필해 줘. 그리고 당분간 내가 이력서 보냈다는 말은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 주라..."
나는 90년대 말 외환위기(소위 IMF) 시절 신입사원으로서 전사 기획팀으로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회사 규모가 작았다. 제조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인력을 모으고,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장비를 주문하고, 새로운 공장을 셋업 했다. 기술기업 회사들이 사업초반에 그렇듯 매출이 크지 않았고, 설비투자로 인한 감가상각비를 커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원가업무부터 시작, 결산, 사업계획 수립, 신제품 수익성 평가 등 기초업무부터 시작했다. 당시 영업팀과 자금/회계 조직만 서울에 근무하고 나머지 조직은 공장 내 사무동에서 근무했다.
대리로 승진할 무렵,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했고, 나도 서울에 신설된 전략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막내로서 중장기 사업계획, 투자 계획 등 숫자와 관련된 업무를 하다 운 좋게도 회사가 한국과 미국, 동시에 상장하기 위한 전사 프로젝트(Project)에 합류할 수 있었다. 전세기를 타고 해외투자은행 인원들과 함께 몇 주간 해외 로드쇼(Roadshow)를 돌았다. 특히 주관사로 선정되었던 4개의 투자은행 사람들과 협업하며, 관련 Case나 갚가치평가(Valuation)기법들을 배웠고, 출장에서 복귀했을 때는 업에 본질을 반영 가능한 로직을 가지고 나만의 Valuation Modeling을 할 수 있었다. 기업공개(IPO)는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덕분에 NYSE(뉴욕증권거래소)에서 벨을 울리는 모습도 직관할 수 있었다.
얼마 후, 회사는 성장을 위한 새로운 사업모델로 In-Organic 성장을 통한 사업확대를 목표로 세우고 M&A조직을 신설했고, 나는 IPO(기업공개) 프로젝트 참여를 계기로 인수대상 기업의 가치평가를 하는 역할로 조인했다. M&A업무를 처음 접하고, 일련의 프로세스를 1년쯤 경험했을 무렵, 그룹 지주회사의 오퍼를 받았다. 회사의 성장을 인정받아, 지주회사에서도 우리 회사 출신의 인원들의 비중을 늘린다는 설명이었다. 당시 상사였던 오상무(얼마 전 면접했던 사업부장이시다)는 대리였던 나를 추천했다. 그룹 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기쁨과 M&A업무 전문성 축척사이에서 갈등했다. 보통 지주회사 경험은 4~5년이 일반적이고, 극히 일부가 남고, 대부분은 기존회사로 복귀했다. 남을 수 있는 부류는 개인의 역량과 소속사의 그룹 내 위상이 고려되었다. 이제 막 이름을 올린 우리 회사 출신은 지주회사에 잔류해서 성장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렇다면, 복귀를 염두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라 가정했다. 당시 대리인 내가 회사에 복귀하는 시점은 과장임기말 또는 차장 초임이었다. 지주회사 후광을 업고 팀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건방지게도 좋은 기회를 날렸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는 전사 경영기획팀으로 이동했고, 몇 년 후, 팀장이 되었다. 기업가치 평가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투자 경제성 검토하는 로직을 수정했고, 퇴사하기 직전까지 회사 투자검토의 기본 폼으로 활용되었다.
또다시 월요일. 이력서 하나 보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자존감이 높아졌다. 무기력하게 처분만 기다렸던 모습에서 회사의 방해 없는 옵션을 하나 만들었다는 만족감이 움츠렸던 자존심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한 듯했다. 옹상무는 주간회의 후에 개별 면담을 요청했다. 또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어떤 망언에도 스트레스는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