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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 이부장 Jun 24. 2024

04... 부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

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04

당연히 성공하리라 기대했던 면접에 실패하자, 회사에 더 이상 믿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비루했다. 든든했던 직장이 낯설었다. 어떻게든 버텨서 재기해야 한다는 생각과 지저분한 정치놀음에서 벗어나 퇴사 하자는 생각이 교차했다.


이봐, 옹상무... 네가 뭔데 날 바꿔! 서전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당신 오래 다니게 해 준데?

후임을 누굴 세울 건데? 네가 시키는 대로 할 것 같아서 골랐냐? 이번에 얼마나 부리다 버릴 건데? 

내뱉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떠 올랐다.


용기 없는 머릿속 외침을 잠재우고, 곧 고3이 될 딸과 대출금을 생각하며, 고민을 마무리하고 현실로 복귀했다. 우선, 두 번째 선택지였던 전략담당산하 과거 M&A시절 지분투자 했던 자회사 관리업무와 같은 전략조직의 실무자로의 이동이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빠르게 해당 팀장을 만났다. 행여나 팀원으로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갖고 있을까 우려가 되어서였다. 다행히 과장시절 팀동료이자 선배였던 그는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함께 일해주면 든든하다며, 환영한다고 했다. 한결같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오전 3시. 새벽에 잠이 깨었다. 출근 시간이 몇 시간 남아 다시 누웠다. 자존심이 상해 잠이 오질 않았다. 팀원들에게 생색내지 않고 평소처럼 야근을 하고 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서야 하는 것일까? 과거의 몇 명의 선배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양한 케이스였으나, 공통된 점은 회사는 (사실여부는 지금도 모르지만) 개인적인 비리를 만들어 냈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타협은 되었으나, 퇴사했고 불명예스러웠었다. 나는 비록 떳떳하긴 하나, 팀장 자리를 지키고자 뭔가를 벌여도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 인사팀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 스스로를 증명하며 싸우기엔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승산도 없고 상처만 될 싸움이라는 게 너무 극명하게 보였다. 그냥 비겁하더라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평소처럼 출근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옹상무의 호출!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낯선 얼굴이 앉아 있었다. 둘이 커피라도 마신 듯, 찻잔이 마주 보며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면식이 있던 사람이었다.


"인사해.... 용책임은 알지?"


아... 옹상무가 경질되기 전에 같은 부서에 있던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떠 올랐다.


"이팀장 후임이야..... 이팀장이 괜찮다면, 오늘부터 여기로 자리를 옮기라 할까 하는데..."


해외주재원 언급하며, 맘에 천불이 나게 굴더니만, 그사이에 급하게 꼭두각시 하나 찾았구먼, 인사팀이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이거였어?


예전부터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사람은 교육의 정도, 자산의 규모와 별개로 '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추진력만 보자면 나무랄 것이 없겠지만, 사람의 격으로 보자면 좋지 않은 사람이란 걸 다시금 실감했다.


옹상무는 내 의견이 필요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기에 답을 하지 않았다.


"인력 충원 목적의 내무전배로 하고, 일단 팀원 자리에 있으면서 업무 익힐 수 있도록 하지"


일방적인 통보였다. 새삼스럽지 않았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대락 1시간 뒤에 용책임은 노트북과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4명이나 퇴사를 한터라 팀엔 빈자리가 많았다. 어리둥절하는 팀원들에게 "충원받았다"라고 짧은 설명을 했다.


옹상무는 팀의 보고를 받는 모든 자리에 용책임을 배석시켰다. 그는 타(他) 사업부에서 나와 유사한 업무를 해왔던 것 같았다. 익힘이 빠르고, 업무 전문성도 갖춘 듯 보였다. 속내를 모르는 팀원들은 좋은 사람이 충원되었다며, 좋아라 했다. 여전히 많은 보고 준비에 짓눌려 이렇게 한 주가 흘렀다.


일요일 아침, 어제도 출근해서 일을 한터라 오늘은 늦잠을 자려고 했다. 아침부터 전화기가 울렸다. 옹상무였다.


"이팀장, 어제 이메일로 송부했던, 보고서 있잖아, 그거 월요일에 사장님께 보고 해야 하니, 오늘 같이 리뷰 합시다."

"......."

"그리고, 회사 말고 우리 집 근처에 스타벅스에서 봅시다.  용책임도 불렀어."


당연하다는 듯이 전화를 끊는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출동준비를 했다. '나쁜 새끼. 어제 골프 친다고 제대로 보지도 않더니...'


옹상무의 집을 알게 된 것은,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가끔 퇴근하면서 옹상무의 차를 운전했기 때문이다. 회사 규정상, 상무는 전담기사가 없다. 술을 마셨을 때, 대리기사는 지원이 되지만, 평소에는 자가운전이 원칙이다. 야근을 하고 있을 때, 이따금 불러서 같이 퇴근하자고 하곤, 자연스레 운전을 시켰었다. 처음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 옹상무와 함께 일했던 입사동기한테 물으니, 자기도 자주 했었다고 했다. 심지어 자기는 집이 일산인데, 강남인 옹상무 집까지 운전을 해서 주차한 다음에 집에 가곤 했다는 말도 했다. 본인은 자기가 좋아서 했다고, 강요는 없었다는 불필요한 말까지 붙여가며 설명했다.


스타벅스에 도착하니, 옹상무와 용책임이 와 있었다. 와이파이 연결하고, 회사 방화벽을 통과해서 자료를 열었다. 엑셀파일을 열어서 주요 전제사항과 시뮬레이션(Simulation) 결과를 설명했다. 몇 가지 시나리오를 추가하자고 해서 작업을 하고, 이를 보고장표에 반영하니, 시간은 저녁때를 지나고 있었다.


"뭐, 먹을래? 저녁 사줄게"


집에는 이미 늦는다 카톡을 보낸 터라, 달갑지 않은 식사를 함께 했다. 운전을 핑계로 술은 마시지 않았다. 반주라 해도 유쾌하지 않은 자리라 억지로 애쓰고 싶지 않았고, 대리비까지 치르긴 더욱 싫었다. 간단히 먹자는 제안은 무시당했고, 동내 맛집을 소개한다며 데려간 곳에서 고기를 굽고 반주도 하는 곳이었다. 나는 빠르게 허기를 채우고, 그들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즐겁게 대화하는 그들은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주식, 집값 이야기가 애완견으로 갔다가 옹상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자랑으로 이어졌다. 세상 관심 없는 이야기를 정성껏 하길래 오랫동안 무표정하게 듣다가 나왔다. 반주만 한다는 술은 두 병을 넘게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최근 벌어진 일을 되새기며 수치심을 느꼈다. 존중받지 못한 채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수십 번씩 들었다. 빨리 부서를 옮기고 싶긴 하나, 면팀장이 된 채 예정부서에 팀원으로 복귀하는 것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고려해 보지 않았던 이직에 대한 욕구가 생긴 것은 이때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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