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이야기... Part02
"지금, 바로 자리 비우겠습니다!"
20년의 커리어를 한순간에 끝낸다는 통보나 다름없는 이 상황, 불필요한 예의는 사치라고 느껴졌다. 옹상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고, 애써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아니, 후임이 해외에서 귀임해야 하니, 3월까지는 네가 있어야지"
뭐라고? 부임한 지 며칠 만에 내 후임까지 이미 정했다고? 새판을 짜놓고 통보하는 거였다고? 몇 명 되지도 않은 해외 주재원별 귀임일정을 뻔히 알고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를 정성 들여했다. 뻔뻔하고 염치없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그의 능력에 새삼 놀랐다.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상황인데,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팀장이 잘못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늘 열심히 하고, 착하고, 예의 바르데...."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자, 잘못이라니?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걸까?.... 회사에서 착하다는 소리는 '무능력'의 다른 표현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예의 바르다는 말 역시 '독하지 않다' 즉, '일의 마무리가 약하다.'라는 의미 이기도 했다. 옹상무는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듣기 좋은 말로 기만하고 있었다.
"이팀장이 너무 지쳐 보여서 그러는 거야"
지쳐 보이는 게 아니라, 지쳤다고. 너 같이 무책임한 선배들 뒷 치다꺼리 하느라... 결정도 안 하는 너네들에게 밤새가며, 자료 해대느라... 내 근태를 봐봐, 퇴근시간과 출근시간의 간격이 6시간이라고... 이렇게 2년째 살고 있어. 출퇴근 왕복 2시간을 빼면, 집에는 4시간만 머물고 있었다고... 씨발! 후임자 알아볼 시간에 근무기록이나 보지... 게다가 몇 달 사이에 팀원 10명 중에 4명이 퇴사를 했는데, 그분은 불필요한 보고조차 줄일 생각이 없고, 당신도 막아줄 생각은 안 했지? 밤샘해서 만들어가면, 보고를 받고도 의사결정이란 걸 하질 않잖아.... 업의 본질은 뭣도 모르면서 공방대 질만 하잖아. 당신도 당해 놓곤 몰라? 상사라면서,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고, 충원해야 한다니까 희망퇴직기간이라 어렵다고 한 게 누군데...
"아, 그리고 지금 내가 한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나는 이런 취급을 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순간 머릿속에 여러 사람을 떠 올려봤다. 임원 되려면, 본사에만 있지 말고 사업부 경험을 통해 옵션 하나 더 만들라던 그분? 네가 사업부로 온다면 언제든 환영이라며 끌어안아주던 그분? 머릿속이 바쁜 가운데, 분노와 실소가 불규칙하게 교차했다.
"면팀장 통보받고, 4개월이나 봉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들어서 그리 못하겠습니다!"
"그럼 2개월만 하자, CEO 새로 부임하시면서 사업계획을 다시 짜기로 했다니까 마무리는 해야지."
상황을 이리 만들어 놓고 마무리를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팀장 자리는 내놓으라 해놓고 사업계획을 새로 짜라니? 권리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의무는 다하라는 수작이었다. 사람은 맘대로 갈아 치우면서, 혹시나 일이 차질 나서 본인 명성에 누가 되는 것은 싫다는 자기성애자.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지 고민해서 알려주라"
옹상무는 기존에 던진 말들을 채 마무리하지 않은 채, 뱃속에 찬 똥을 배설하듯,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쏟아냈다. 야근하다 말고 갑작스러운 질문 끝에 면팀장 통보, 이미 인사팀과 이야기를 마친듯한 상황 전개가 당황스러웠다. 조직에 대한 실망감, 일방적인 면팀장 통보에 대한 당혹감, 한 때 존경했던 선배에 대한 배신감 등이 뒤엉커 뒷골이 뜨겁고, 현기증이 났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섰다. 보고를 위해 들고 들어갔던 서류더미와 계산기를 주섬주섬 챙기고, 서둘러 옹상무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자리로 돌아와 바로 퇴근 준비를 했다. 보고고 뭐고 이런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가방을 메고 일어서는 순간, 지친 표정으로 내일 보고를 준비하는 팀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을 들었다 놨다를 여러 번, 난 바보처럼 아무 일 없듯이 옹상무가 지시한 수정사항을 팀원들과 리뷰하면서 보고 준비를 마무리했다. 당혹감에 삼켜져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와버린 바보 같은 모습이 후회스러웠다. 지금이라도 다시 들어가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해주고 싶은데, 맘 한 편에서 조직이동이나 퇴직 시, 혹시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수를 생각하는 나를 보면서 실소했다. 나도 비겁하구나! 용기가 없구나! 나는 옹상무랑 다른 사람일까?
다음날 오후, CEO 보고는 옹상무만 참석했다. 별다른 이슈는 없었다고 했다. 여느 때처럼 추가 검토 사항을 전달받았다. 업무지시를 마치기가 무섭게 옹상무는 이동할 부서를 정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면팀장 통보를 받은 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다음 수순을 밟고 있었다. 통보했으니, 이제 퇴출시키겠다는 의도를 감출생각이 없었다. 월급 받는 노동자끼리 유대감이란 게 있을 텐데, 옹상무는 격을 한참이나 벗어난 인간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사고를 거쳐 나온다고 믿었는데, 그는 다섯 살짜리만도 못한 단어를 수시로 뱉어내고 있었다.
재촉에 지친 듯, 나의 거취에 대한 옹상무의 제안은 회사가 어려우니, 비용절감을 위한 Task리더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딴생각 못하게 Task에 가둬두고, 경험과 노하우를 끝까지 갈취하겠다는 어설픈 제안이었다. 혹시나 미리 준비 중인 것이 있었나 싶어 Task멤버 구성을 물었다.
"아.. 그거? 이제부터 이팀장이 구해와야지..."
쓰레기 같은 새끼.... 뻔한 전개를 두고 실랑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옹상무가 10분 후에 있을 해외 주재원 선발을 위한 '인재소위'에 사업부 대표로 참석하러 간다며 갑자기 중국 남경법인에 주재원으로 갈 의향이 있나고 물었다. 고등학교 3학년을 눈앞에 둔 딸을 가진 나로서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단신부임은 예외적인 상황이었고, 지원자가 없지 않은 이상, 이렇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프로세스도 아니었다. 골칫거리를 치우려 안달 난 듯 나의 답변을 채근했다.
"딸아이가 몇 달 뒤면 고3이라 집사람과 상의해 보고 답변 드릴께요"
"바로 회의가 있어서 지금 알았으면 좋겠는데....."
난 단 한 번도 상사와 커리어를 면담할 때, 해외 주재원을 희망한 적이 없었다. 인사기록을 안 봤을 리 없는 그는 온통 머릿속이 자신의 이미지를 '좋은 사람'으로 각인하고 싶은 의도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온갖 기회를 다 주었는데, 까탈스럽게 따진다며, 후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착한 선배' 코스프레가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채근에 못 이여 나는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답변을 했다. 아내와 상의를 해봐야겠지만, 지금 꼭 말해야 한다면, '단신부임'을 전제로 가겠다고 했다. 결정을 강요당하는 처지가 서글펐다. 인사팀은 이런 사실을 알까?
예상대로 회의 결과는 예정자가 있었고, 갑작스러운 후보자 변경은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정이었다. 옹상무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맞는 최소한의 처우를 기대했던 나도, 아무 말 대잔치로 인해 남아 있던 애사심마저 없앤 옹상무도,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두서없이 반복되는 부서 이동제안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들고 빈 회의실 구석에 앉았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희망 부서를 쓰고, 이유와 비전을 적어 옹상무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본사 경영기획팀장으로 조직책임자를 시작했던 내가,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사부서로부터 리더십 이슈라던가 그 어떠한 사전경고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고 부당한 조치는 누군가의 입김과 옹상무 개인의 욕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모른 채 한 인사부서가 만들어낸 이상한 상황이라 생각되었다.
여전히 나는 팀장 직책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철이 없게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해서 1 지망은 최근에 팀장이 퇴사 예정이라는 A사업부의 사업 전략팀장 자리를 적었다. 어제 옹상무에게 말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상황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2 지망은 과거 M&A팀원 시절, 지분투자 했던 자회사를 관리하는 전략담당 산하 실무자 역할로 적었다. 팀장이 아닌 팀원으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회사에 남아 다시 내 위치를 찾을 수 있고, 최대한 옹상무 등의 무리와 업무적으로 멀리 있는 조직에서 당분간 숨어 지내는 것을 고려했다. 그리고, 치기 어린 마음에 3 지망은 적지 않았다.
다음날, 옹상무로부터 메일 회신을 받은 것은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이었다. 2개 안 모두 동의한다는 내용과 1 지망 자리를 위해서 A사업부장, 인사팀장과 인터뷰를 의뢰했고, 오늘 늦은 오후에 가능하다고 했다. 신속하고 빠른 대응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아 뭔가 불안했다. 인터뷰 시간이 다 와가도록 A사업부 인사팀장은 연락이 없었다. 주요 커리어에 대한 것은 이미 시스템에 기록이 있고, 희망퇴직 기간이다 보니, 일이 바빠 그런가 했다.
인터뷰는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A사업부장 집무실에 A사업부장, 전략/마케팅 임원, 그리고 사업부 인사팀장이 배석했다. 예상대로 지원사유와 업무경험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희망했던 A사업부 사업전략팀장은 전략/마케팅 임원 산하였고, 해당 임원은 A사업부에만 계셨던 터라, 나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몇 년간 경영회의를 주관했던 나를 최소 한달에 한 번씩은 봤었는데.... 부정을 위한 부정이었다.
내 이력에 전략커리어가 있고, 학부 전공이 수요와 공급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학이었으며, 중장기 전략을 수백 번 수립하면서 산업 내 수요/공급을 보는 인사이트(Insight)가 있음을 설명했고, 구체 사례도 들었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 사업부 인사팀장에게 물었고, 인사팀장은 모르다는 황당한 답을 하며, 들고 온 서류 몇 장을 뒤척거렸다. 당시 나의 직속상사였던 A사업부 사업부장도 전사전략을 했었다고 언급을 하셨으나, 사업부 인사팀장은 형식적으로 서류를 몇 번 뒤척이다 침묵했다. 질문 몇 번에 기대했던 인터뷰는 끝났다. 일어서는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몇 마디가 오갔다. 결과는 별도로 통보해 주겠다는 말을 등 뒤로 나는 A사업부장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퇴근 무렵, 인터뷰를 했던 A사업부장께서 다시 부르셨다. 갑자기 부서를 옮기려는 이유를 물으셨다. 평소 존경했던 분이라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시계열적으로 설명드렸다. 억울함이 앞서다 보니, 격앙된 목소리가 되었다. 털어놓고 나니, 후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불안했다. 나를 잘 아는 본인은 팀장으로 임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인터뷰 자리를 만들었는데, 전략/마케팅 임원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고 했다. (본인이 점찍어둔 내정자에 비해) 나이가 많고, A사업부 업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고 하셨다. 만약, 나를 정말로 필요로 했다면, 사업부장 직권으로 찍어 누룰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서운한 마음이 스쳐갔다. 성의를 보여 주신 점은 감사했으나, 당황스러웠다. 모든 우주가 나를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이 한심했고, 저런 안목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으니, 잘 될 리 없다고 조소했다.
아무튼 신경 써 주신 A사업부장님께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나왔다. 무기력한 나 자신과 나를 이렇게 계획적으로 방치는 회사가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이 흉계를 꾸민 위정자가,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긴 옹상무가 한없이 밉고, 조직 생활에 환멸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