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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 이부장 Jun 03. 2024

01…당신에게 첫 직장의 의미는?

40대 중반, 준비되지 않은 이직 이야기... Part01

25년 차 직장인입니다. 앞으로 쓸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각색한 내용입니다. 필요에 따라 상황적 표현을 추가하였습니다. 상상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비자발적 이직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다시 저녁.

사내 식당에서 급하게 식사를 마치고, 바로 양치를 했다. 아직 내일 보고를 위한 사전 리뷰가 2건이나 남았다. 회사는 어려운 협상을 앞두고 여러 날을 야근으로 몰았다. 장기간 이어지는 보고 준비로 팀원들은 모두 번아웃(Burn-out) 상태였다. 최근 한 달 사이에만 팀원 10명 중 4명이 퇴사했다. 희망퇴직의 영향이 컸다. 보고 준비와 설득, 혼자만의 좌절이 반복되고 있었다.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거나, 용기가 없어 잔류한 우리의 상실감은 무척 컸다. 회사는 인원 감축 목표 달성에만 관심을 둘 뿐, 팀워크의 와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방치했다. 희망퇴직을 지시한 사람도, 준비한 실무진 모두 무지했고,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지칠 대로 지친 몸과 영혼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두 번째 리뷰는 오후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준비된 자료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팀원들과 잠을 줄여가며 준비했기에 감정소비나 시간낭비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질문에만 간단히 답변을 드렸고, 보고를 위해 보충할 자료만 담백하게 지시를 받았다.


"이팀장은 좀 남지..."


부임 2주 차인 옹상무의 짧은 지시. 내심 부족한 걸 알면서도 시행착오로 인한 야근을 줄이기 위해 보고를 강행한 것에 대한 질책이리라.


"문 좀 닫지"


집무실에서 답배를 빼어 문 옹상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적이 이어진다. 나는 어색함이 싫어 말을 건넸다.


"부족하지요?"

"계속 이렇게 일이 많았나?"


대화는 시작부터 어긋 나고 있었다. 잠시 침묵...


"그렇죠, 저는 2년째, 팀원들은 3년째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또다시 침묵. 옹상무는 급하게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만약에... 다른 일을 한다면, 이팀장은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상의라기 보단 준비했던 말을 뱉는 느낌. 데자뷔! 부임 이틀째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불현듯 떠 올랐다.


여러 개비가 재가 된 담배연기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공기청정기가 큰소리를 토해낸다.

왜, 다시 물을까? 왜, 지금 묻지? 생각이 많아졌다. 옹상무는 내 침묵이 길다 느꼈을 것이다. 서둘러 답을 했다.


"만약, 보직을 바꿀 수 있다면, '사업전략'짜는 일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쥐어짜듯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되묻는다. 못 들었다기보다는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언어적 습관처럼 느껴졌다.


"사업전략이요."

"내가 다시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팀장이 너무 지쳐 보여... 번아웃이 될 것 같아"


말은 주고받았지만,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보고에 치여 살다 보니, 내가 이상해졌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 대화의 속내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팀장이 이러다가 쓰러질까 걱정되네... 좀 쉬게 해 줄까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전개에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춘 듯했다. 뭐라 답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뗐다.


"팀장.... 바꾸신다는 거죠?" 잠시 침묵.
"응, 그렇지..."


뭐, 뭐라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왜 나한테 이러지?


"상무님 생각이신가요? 아님, 지시를 전달하시는 건가요?"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졌다. 흔들리는 눈동자, 즉답을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생각이지...."

거짓말이다. 분노가 치민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마치 옹상무 탓인 것처럼 피가 솟구치듯 얼굴이 벌게 졌다. 약 1년 전 경질되어 본사를 떠났다가 급작스런 복귀에 의아했지만, 맘에 여유가 없어 고민해보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았던 것이라 짐작되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긴 했다. CFO?... 다만, 내가 업무적으로 실수한 것은 아니어서 맘에 두지는 않았었다. 설마 아니겠지? 오히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는데... 그게 자존심이 상했다고? 그래서 이렇게까지 한다고? 차라리 솔직하게 이리되었다 설명이라도 하지. 그 사람 이름을 팔자니 두렵고 쪽팔려서 말을 못 하나? 20년을 알고 지낸 후배에게 자초지종도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선배가 못나 보였다. 급하고,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어설픈 시도가 싫었다. 소름이 돋았다.

답답하고 무기력한 상황에 욕이 나왔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내편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없었다.  팀장이란 타이틀을 달 때부터 무척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슴 한편이 허전했던 이유는 이런 것이었을까?

나에게 회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공들여 고민해 본 기억은 없다. 지금 돌이켜 보니, 나는 (순진하게도) 회사를 나와 동일 시 했던 것 같다. 입사 초기, 너무도 어설펐던 나는, 회사에서의 지위가 나의 사회적 지위와 동일 시 되는 것이 두려웠고, 빠른 시간 내 회사 업무에 능숙해지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새로운 일을 마다 하지 않았고, 덕분에 유의미한 경험들이 축적되었다. 나의 청춘 시절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낸 회사는 나에겐 어쩌면 내 모습 그 자체였었고, 그 가치를 무시당하는 이순을 나는 받아 드리기 어려웠다.

그룹에서 분사, 합작회사(Joint Venture) 설립, 한국/미국 동시 기업공개(IPO), 성장을 위한 수많은 해외출장과 M&A... 회사에서 애쓴 20년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친다.  바보처럼 같은 회사에 20년을 다니면서 회사와 같이 성장할 거라 믿었던 신념이,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믿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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