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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홍 Sep 17. 2021

오!늘 사진 [10] 돈쭐 내 드릴게요! 사장님

스승이자 부모님 같은 분의 식사초대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예전에 먹어봤는데 아주 맛있고 기운이 나더라고..."


70대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

시골길 갓 쪽, 평범한 식당


점심 손님이라곤 달랑 우리, 네 명이 전부였다.

어찌하다 보니 예정보다 1시간이나 빨리 도착했다.

7학년 3반이라는 사장님은 아들이 옆 창고 건물에서 고기를 구워 온다며

"너무 빨리 오셨네. 너무 빨리 오셨어!"

라고 거듭 말씀하시며 얼굴 가득 자글자글 근심을 모으셨다.


"저희는 괜찮으니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대답해놓고 처음 온 곳이라 여유롭게 식당 내부를 둘러봤다.

어두운 식당 분위기와 달리 여기저기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특히 구석진 에어컨 위쪽에 찬밥처럼 걸린 것은 흔한 해바라기 그림인데도 나의 눈길을 계속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진 by연홍

집 뒤로 강이 흐르던 고향을 연상케 하는 그림도 반가웠다. 

강에 걸쳐있는 다리를 건너면 금방이라도 어릴 적 석동 친구들이 뛰놀던 동네가 나올 것 같았다.

사진 by연홍

"여기 누가 그림 그리는 분 계세요?"

아직도 문학소년 감성이 살아있는 낭군이 먼저 사장님께 여쭈었다.


사장님은 근심 가득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학생 때 며느리가 그렸답디다. 지금 병원에 갔는데..."

건성으로 답하시곤, 그림에 관심 가질 마음의 여유가 1도 없어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신다.


7남매 장남에게 시집와서 갖은 고생 끝에 어린 시동생들 다 가르쳐 분가시켰더니,

장성한 시동생들은 사람 노릇은커녕 여태까지 자신을 이용만 해 먹는단다.

해도 해도 너무 해서 이젠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큰맘 먹고

"이젠 못 해요. 못 합니다!"

라고 시동생들에게 거절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단다.

'형제끼리 화목하라!'

라는 성경말씀이 자꾸만 생각나 괴롭다며...


없는 살림에 자식들은 모두 명문대에 유학까지 보냈는데...

아들 녀석은 취업할 생각 않고,

얹혀사는 것도 속 터지는데 하필 그 큰 손주가 친구에게 맞아 입원한 것이다.


듣고 보니 사장님의 얼굴에 돌덩이처럼 굳어있는 근심 걱정이 이해가 됐다.

"에휴! 하나님은 제가 뭔 죄가 많아서 이러실까요?"


한숨을 푹 쉰 사장님은 신세한탄 2탄을 연속 풀어내셨다.

"우리 집 식당에 모든 채소는 우리집 아저씨와 함께 직접 식당 옆 텃밭에서 기른 겁니다.

손님들이 돌아가실 때면 고추든 가지든 호박이든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은

하나님이 제게, 저 손님에게 주라!  하시는 것 같아서 몽땅 따서 싸드리곤 하지요.

근데 손님들은 그걸 당연시 하드라고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주지 않을까... 바라기만 하니 참나!"


그것 때문에 며느리와 자꾸 싸우게 된단다. 그럴 때마다 사장님 하시는 말씀...

"얘야 며눌아가, 나야 몸댕이만 살살 움직였을 뿐인데

하나님이 저리 주렁주렁 열매를 주셨잖니.

그러니 그걸 어찌 나 혼자만 먹을 수 있겠어?"


사장님의 신세 한탄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마음 깊이 울림을 주며 공명했다.

그때 마침 마스크를 쓴 며느님이 병원에서 돌아왔는지 구운 고기를 가져와 식탁을 차린다.

괜스레 남 일 같지 않아 다친 아이 안부를 물었다.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며느리는 똑똑한 눈빛을 빛내며

시어머니의 잘못된 기억을 바로 잡아서 자기가 그린 그림은 몇 점 없으며,

대부분 친정 엄마의 화가 친구가 식당 잘 되라고 축복하며 주신 그림이라고 팩트 체크해줬다.

그리고 아이는 퇴원해서 다행히 생활하는 데는 지장 없단다.

하지만 아이가 입원 해 있던 지난 며칠은 너무너무 속상하고 힘들었다며

그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어 놓듯... 처음 보는 우리에게 속을 다 털어놓는다.  


우리, 네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설 때까지 더 이상 손님은 없었다. 

점심 장사는 이걸로 끝인 게 분명했다. 

며느님이 둘째 아이와 함께 한쪽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마음으로 이미 조카처럼 친숙해진 큰 아이를 병문안 간 셈으로 지갑을 열어 며느님 앞치마에 넣어드리고, 

밥 먹는 아이에게도 명절 용돈 삼아 얼마를 쥐어주었다. 내가 받은 감동의 깊이만큼...

사장님이 손수 길러 싸 주신 가지와 호박 : 사진 by연홍

그리고 식당 밖을 나서는데 우리에게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사장님은 어느새 가지, 호박, 고구마를 바리바리 싸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미 낙심하여 넘어지셨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밴 착한 행실을 따라 오늘도 선한 일을 계속하시는 사장님...
오! 진정 당신이 이 땅에서 승리자이십니다!


낭군이 얼른 건네주는 신사임당을 들고,

마음만큼은 5백만 원어치를 듬뿍 담아서 다시 아이에게 달려가 용돈을 얹어 주었다.  

- 이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너희 할머니 사장님께 받은 걸, 네게 다시 돌려줄 뿐이란다!


그리고 보았다.

처음 보는 어떤 분이 해처럼 환한 얼굴로 길 가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고 계셨다.

- 저분이 누구지?... 아하!

앞치마를 보고서야 알았다. 

쭈그러진 양푼처럼 2시간 내내 온갖 근심 걱정으로 펴질 줄 몰랐던 바로 그 사장님이셨다.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딱 2시간 만에 알았다.  

사장님은 고된 일로 엄지 손가락 인대가 늘어난 손을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흔들고 계셨다.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신 사장님...
당신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부자십니다!


잘난 자식은 나라에 뺏겨 1년에 한 번, 제대로 보기도 힘들다는데...

굳이 연로하신 부모님께 돌아와 손주들 재롱 보여드리며 알콩달콩 살려는 잘 키우신 아드님, 

시골에 함께 살러 오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귀한 며느님과 토끼 같은 손주들과 함께

천수를 누리시며...

각박한 세상에 따뜻한 온기! 오래오래 전해주십시오.

고된 일로 인대가 늘어난 사장님 손! 뭘 이깟 걸 찍느냐는 말씀에 이렇게 훌륭한 손은 알아줘야 된다며 굳이 사진으로 찍었다. : 사진 by연홍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갈 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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