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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Oct 06. 2020

언젠가 되겠지, 막연한 믿음을 체험하는 일

쓰는 요가


더는 버티고 싶지 않은 나, 뭔가를 더 하려고 욕심내는 나, 실패해서 좌절하는 나, 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나, 수많은 얼굴들이 나를 매트 위에 서게 만든다 그중에 가장 자주 만나는 건 “잘하고 싶어 하는 나”


얼마 전 다니던 요가원을 옮겼다. 평소 수련하던 곳을 좋아했기 때문에 내게는 큰 결심이었지만, 아쉬탕가 마이솔 수련을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다니던 요가원에서 아쉬탕가 수련을 일주일에 한 번씩 1시간으로 압축해 들을 때마다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수련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커졌다. 부스터를 돌린 듯 호흡할 때마다 에너지가 차곡차곡 쌓이는 아쉬탕가 요가가 힘들지만 너무 좋았다. 또 어떤 수련의 묘미를 안겨줄까 기대하며 시작한 마이솔 수련,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몸이 힘든 걸 떠나서 내 욕심이 걸림돌이 되었다. 


마이솔 수련은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하루 만에 다 배우는 게 아니라, 수련의 상태에 따라 선생님이 허락한 진도까지 나갈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마이솔 수련을 시작하니 동작은 다 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진도를 나가고 싶어 하는 내가 매트 위에 서 있었다. 역동적인 아쉬탕가 아사나만큼이나, 생각의 흐름이 아주 역동적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나도 다음 진도 받고 싶은데’ ‘나도 저 자세하고 싶은데’ ‘난 안 되네’ ‘왜 오늘도 안 되지’ ‘너무 힘든 걸 겁도 없이 시작했나’ ‘일반 수련을 더하고 마이솔을 시작할걸’ 기대와 욕심, 실망과 후회가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매트 위 블랙홀처럼 함께 했다. 


마이솔 수련을 시작하고 나를 가장 괴롭힌 건 ‘마리차사나 D’ 원래 다니던 요가원에서 아쉬탕가 수업을 할 때 딱 한 번 마리차사나D를 시도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이 뒤에서 팔을 잡아줬지만, 전혀 닿지 않던 내 손가락들. 반가부좌를 틀고 팔을 다리 뒤로 꺾어서 양 손가락 끝을, 아니 팔목을 잡으라니.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동작인가 싶었다. 내가 꼽은 미스터리 아사나 중에 하나. 그런데 프라이머리 하프 시리즈에 도달하기도 전에 바로 그 마리차사나D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요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살면서 온몸을 그렇게 비트는 일이 죽을 때까지 없었을 것 같다. 어떻게든 몸을 꾸역꾸역 접어보겠다며 안간힘을 쓸 때면 이따금 현타가 왔다. 내가 무슨 요가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더 마음이 건강해지자고 시작한 게 요가인데 할 때마다 이렇게 짜증이 밀려온다면 수련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게 아닐까. 내가 이 자세에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왜 이러고 있지? 그렇게 온몸을 구겨 아등바등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와서 자세를 도와주시곤 했다. 그러면 또 신기하게 손가락 끝이 잡히는 것이다. 혼자 할 땐 안되고 선생님이 도와주면 되고 또 혼자 하려면 안 되고 하 이 깊은 답답함. 마리차사나D를 할 때면 머릿속이 아니 마음이 시끄러워진다. 


나도 빨리 부자피다사나, 바카사나 같이 멋있는 아사나를 해보고 싶다. 아마도 마리차사나D를 실패할 때마다 오히려 그다음 진도에 대한 욕심이 점점 커졌기 때문인 것 같다. 예상 못한 오기와 집착, 욕심의 소용돌이 안에 내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또 그래 뭐 언젠가는 되겠지. 안 되는 걸 집착해서 무엇하나. 집착의 파도가 가라앉곤 했다. 


마이솔을 시작한 지 고작 몇 주, 그런데 이 수련을 괜히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고비가 왔다. 손목 통증이 생긴 것이다. 요가를 하고 어디가 아픈 적은 없었는데 왜 아프지? 내가 왜 아프면서까지 요가를 하고 있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적신호를 강하게 느꼈다. 요가를 계속하려면 마리차사나D고 뭐고 손목부터 지켜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련은 손목 통증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를 찾아가고 있다. 선생님들한테도 물어보며 알게 된 건, 여태 차투랑가를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푸쉬업 하듯 내려가는 자세인 차투랑가에서 나는 내 온몸의 무게를 손목에 의지해 지탱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통증이 쌓여왔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수련을 하려고 시작한 마이솔인데 아프면서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잘못하는 건 잘-못하는 것보다 더 별로다. 


그래서 한동안의 수련은 다른 아사나보다 차투랑가와 업독에만 집중했다. 팔, 팔, 팔이 벌어지지 않게, 손목에 내 모든 무게를 쓰지 말고, 가슴을 쓸 것. 팔팔팔, 어깨 어깨 어깨, 가슴 가슴 가슴. 마음속으로 되새김질하면서 차투랑가에만 신경을 썼더니, 짧은 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아주 편한 차투랑가와 업독을 느꼈다. 자세가 정말 제대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정감을 느끼고 나니 ‘아 내가 정말 뭔가를 잘못하고 있었구나’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손목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수련이 기뻤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마리차사나D. 역시나 손을 잡지 못하고 역시 안되는구나 생각하며 그다음인 나바사나에 우르드바까지 나갔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누워있는 나를 빤히 보며 말씀하셨다. “마리차사나 D 손 잡았어요? 양쪽 세 번씩 하세요” 그 힘들고 안 되는 걸 세 번씩 하라니, 다시 돌아가면 나바사나도 다시 해야 하는 건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마리차사나D를 시도했는데, 세상에 두 번째에서 정말 손가락 끝이 잡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고 선생님이 “거봐요 되잖아요”라고 하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평생 못할 줄 알았어요”라고 해버렸는데, 선생님이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라고 했다. 거봐요 되잖아요 그 말이 뭐라고 나는 또 울컥했다. 겨우 손가락 끝이 잡혔을 뿐이지만, 정말 하면 되는구나. 아 너무 좋다. 그래 평생 못하는 게 어디 있어. 



수련을 하면서 평생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를 해내는 날들이 생각보다 꾸준히 찾아왔다. 매트 위에서는 어떤 아사나로 나타나지만, 매트 밖으로 나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으로 바뀐다. ‘하면 된다’는 뻔한 명제를 직접 경험하는 일만큼 자신감을 키워내는 게 있을까. 몸 쓰는 일이라곤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던 내가 평생 꿈꿔본 적 없는 아사나를 내 몸으로 하게 되는 걸 보면, 세상에 못 할 일이라곤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든다. 


어쩌면 이 모든 의식의 흐름이 매트 밖에서 알게 모르게 상처받은 일상의 나를 달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일할 때면 누군가에게 또 평가받기 마련이고,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은 높은 것만 같고, 타인의 시선과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다 문득 잘살고 있는 걸까. 나는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인 걸까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하지만 지금처럼만 꾸준히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매트 위에 내가 응원하고 있던 게 아닐까. 



언젠가 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막연한 믿음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건 꾸준함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꾼다. 막연한 꿈도 막연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매트 위에서 배웠기 때문에. 이것은 요가가 내게 준 매트 밖의 슈퍼 파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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