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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Jun 06. 2022

[쓰는 요가]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를 보내는 일, 후굴

용기나무가 자란다

그다지 유연하지 못한 편인 나는 후굴이 어렵다. 마음을 다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몸을 부드럽게 늘리며 등을 뒤로 말아보려 하지만 어딘가 컥-하고 막힌 숨이 느껴진다. 으악 숨쉬기도 힘든데 사람이 어떻게 몸을 등 뒤로 둥글게 말 수 있지? 매일 도전하면서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영역에 있다. 그래서 나의 로망은 온갖 후굴 아사나이다. 카포타사나, 에카파다 라자카포타사나, 라자카포타사나, 트리앙무코타사나 같은 것들.



특히 후굴대파티로 이어지는 하타 수련을 할 때면 꿈과 현실의 불균형이 빛을 발한다. 마음은 나아가고 싶고 몸은 멈춰서기만 하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이것이 욕심인지 두려운지 알아채야 하는 순간들은 매번 숙제이다. 얼마 전 하타수련에서 ‘비파리타 단다아사나’에 접근했을 때였다. 양발을 붙이고 발 뒤꿈치를 좀 더 뒤통수 방향으로 가져와 보라는 말에 그저 ‘못하겠어요’만 연신 내뱉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뚝딱이는 나를 보며 씩 웃더니 ‘말할 힘 있으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힘으로 한 번 더 해보세요’ 하며 따뜻한 핸즈온을 더해주셨다. 으악 그런가 싶어 한 번 더 도전. 그럼에도 선생님이 말하던 아사나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래 오늘도 정말 죽을 것 같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걸로 된 거다.



누구나 처음부터 몸을 뒤로 둥글게 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리가 쭉쭉 찢어지는 것도 아니고, 몸을 공중에서 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도전해보는 용기가 아사나의 절반이라고 생각한다. 후굴도 마찬가지다. 보이지도 않는 뒤통수 너머의 세계로 손을 뻗어 가보는 것, 나로선 보통의 용기로 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후굴을 열심히 하고 난 다음 날엔 ‘아이고 등짝이야’ 같은 뻔한 앓는 소리 대신 ‘으아 등에서 날개가 자라는 것 같아’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등짝에서 난리 난 것 같은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날개뼈에서 뭔가 솟아날 것만 같은 기이한 근육통. 참나 하다 보니 날개뼈 사이 근육통에 쾌감을 느끼는 날까지 온다. 진짜 요가 변태가 되어가는 걸까. 아니면 그 근육통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이제 아주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일까. 그것은 절대 안 열릴 것 같은 나의 등 가슴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신호이다.



매일 뭐가 늘고 있긴 한 건가 의심을 하지만, 생각해보면 참 많이도 늘었다. 요가를 처음 시작했을 즈음의 내겐 이렇게 다양한 후굴 아사나를 꿈꾸는 건 조차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자주 했던 말이 있다.

깊은 상상 훈련으로도 어쩔 수 없이 내 뿌리는 너무나 연약한 것이었다. 선생님이 보여준 우아한 우르드바 다누라사나처럼 나도 팔을  쭉펴고 올라오고 싶은데 현실은 바닥에서 머리를 떼지도 못하고 혼자서 낑낑거리는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우르드바 다누라사나를 하며 이따금 시원하다 느낄 때도 있고, 꿈 같았던 카포타사나에도 도전하고, 시르사파다 역접근도 해보겠다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를 보내는 일은 당연히 어렵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용기를 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 그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마다 나는 여전히 나무가 되는 상상을 한다. 내 발밑에 뿌리가 있다. 내 뿌리가 매트 아래로 점점 더 깊어진다. 나는 꺾이지 않는다. 그 단단한 뿌리를 타고 내 몸은 부드럽고 길게 뻗어나간다. 등 뒤에 붙은 초록 잎들이 바람의 리듬을 타고 부드럽게 흩날리며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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