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의 대사 중 아직까지 회자되는 유행어가 있다. 선생님(김광규)이 학생(유오성, 장동건)들을 불러서 혼내기 전에 물어본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 질문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언론에 나오는 사회 유력계층 자녀의 특혜의혹이 아니더라도 부모가 법조인이거나 기자인 아이가 있다면, 선생님도 아이 대하기를 조심스러워했다. 내가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군 간부들은 훈련병 중 대령급 이상의 가족이 있는지 확인했다. 나는 아버지가 중령으로 예편하신 걸 살짝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두려운 집단이 있다. 바로 사회복지시설에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볼살 떨리게 추웠던 12월 겨울, 후원자와 후원 아동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던 ‘김 조카’는 처음부터 고아였으니 편하게 “내 부모님은 회사원이야.”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지만.
후원을 몇 년 하면서 금전적인 후원이 아니더라도 챙기는 아이가 늘었는데, 이 중 몇몇은 김 조카와 상황이 좀 달랐다. 조카 S는 무능력과 무책임함으로 무장한 부모로 인해 4남매가 모두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다른 조카 N의 아빠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 아이들의 경우 뻔히 있는 부모를 없다고 하거나 부모를 다른 존재로 묘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어른들의 일상적인 질문에도 조카들은 당황하거나 상처 받을 수 있겠구나.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질문에 대한 아이들의 부담감. 내 상상력은 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김 조카를 후원하고 2년쯤 되었을 무렵, 중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녀석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얼마 벌어요? 선생님 몇 급이에요?”
질문에 당황했다. 아직 삼십 대 초중반이라 직급은 8급으로, 낮은 편이었고 당연히 월급도 적었다. 차도 없어서 김 조카와 다닐 때 매번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시설에 찾아오는 다른 후원자들은 대부분 외제차를 끌고 왔고 나이도 50대 이상의 누가 봐도 성공한 사업가였다.
친구 아무개의 후원자가 수천억 원 하는 공장을 가지고 있고 외제차도 태워주었다며 김 조카에게 자랑을 했단다. 생각해보니 봉사활동을 오는 사람을 제외하고, 시설에 종종 찾아오는 후원자 중에 나 같은 월급쟁이 소시민은 보지 못했다.
아.. 이곳 아이들에게도 존재하는구나.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아니, 느그 후원자 뭐하시노?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둘러 얘기했다.
“너 필요한 거 사줄 만큼은 벌어. 삼촌이 지금은 8급인데 조금 있으면 7급 법원 계장이 돼. 무슨 문제 생길 때 너 지켜줄 정도 힘은 있어.”
조카는 ‘법원 계장’이라는 말에 꽂혀서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검색을 했다. 그러더니
“우와! 법원 계장이면 검사랑 동급이네요!”
라며 기뻐했다.
‘뭐야? 인터넷 어디 그런 엉터리 정보가 담겨 있니? 얘야. 법원 계장은 그냥 법원에 일하는 6~7급 공무원이란다. 검사의 끗발과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낮은 자리야.’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법원 계장이 뭔지는 다른 아이들도 잘 모를 것이니, 김 조카가 “우리 아버지 법원 계장이야.”라고 말하고 다니며, 나를 든든히 여기고 안심하게 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졸지에 검사급이 되어버린 나 스스로가 초라하고 부끄러워지더라도 부끄러움은 나의 몫으로 남겨둔 채..
검사급(?) 법원 계장이 되고 몇 년 후 김 조카가 갑자기 말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그러던데. 삼촌은 좋은 사람이래요.”
너무 뜬금없어서 왜 선생님들이 그렇게 얘기하시는지 물었더니, 나처럼 꾸준히 후원하는 사람이 잘 없다고 했다. 예전에 네가 부러워하던 수천억 후원자를 둔 친구는 어찌 되었냐고 되물었더니 그 후원자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그냥 만나러만 안 오는 건지, 금전적 지원을 끊은 건지, 아님 둘 다인지 다시 물었다. 조카는 돈만 보내고 애들 챙기는 건 포기한 사람도 있고 연락도 없이 금전적 지원도 같이 끊어버린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다른 후원자보다 돈이 적거나 지위가 낮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최소한 난 내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김 조카에겐 아직도 든든한 검사급(?) 법원 계장 삼촌이 곁에 있는 거니까.
이제 성인이 돼서 시설을 퇴소한 김 조카는 자신의 부모가 없음을 굳이 숨기지는 않는다. 누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