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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회 Dec 22. 2020

5. 말할 수 없는 비밀

가정사 조차 없는

중학교 3학년 때 잘 생기고 성격도 좋은 데다가 항상 웃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 녀석의 집에 종종 놀러 갔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롭진 않았지만 집안 분위기도 좋았다. 어머님도 친구처럼 항상 밝게 웃는 상냥한 분이었다. 게다가 미인이시기도 했다. 자기 아들과 바꾸고 싶다며 나를 잘 챙겨주셨다. 이런 가정환경이라 친구가 밝게 자랐구나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학교의 조용한 공간으로 나를 불렀다. 그곳으로 찾아갔더니 녀석이 갑자기 펑펑 울었다. 깜짝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


항상 밝았던 친구는 이혼 가정이었던 거다.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은 부모가 이혼하거나 돌아가신 아이들을 "결손가정"이라며 낙인찍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가정상황을 숨기는 친구가 많았다. 이 친구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미용사였는데, 자신이 고용한 젊은 직원과 바람이 나서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상황이었다. 새 장가든 아버지는 다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버림받았음에도 친구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중학생 혼자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보러 가긴 두려웠나 보다. 이게 친구가 나를 부른 이유였다. 


그날 버스를 타고 친구 아버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허나 친구는 아버지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다. 그저 유리벽 안에 있는 아버지 모습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했다. 멀리서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친구는 많이 울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다. 그냥 등을 두드려주며 곁에 있었다.


 가정사라는 게 그러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공개되는 순간 끔찍한 폭발력마저 있었다. 




“선생님(중학교 졸업 전까지 나를 선생님이라 부름)과 같이 다니는 걸 친구가 목격하면 뭐라고 하죠?”

김 조카는 종종 나한테 이런 질문을 했다. 


“외삼촌이라고 해.”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김 조카의 친구들은 녀석의 고아라는 걸 몰랐다. 나도 녀석의 비밀을 감춰주고 싶었다. 아저씨뻘인 나와 김 조카가 다니는 걸 김 조카의 친구들이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너를 조카 같이 생각한다고도 했다.


아빠라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적었고, 성이 달라서 친삼촌이라 하면 도리어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네가 삼촌이라고 부르면 다른 거짓말은 내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김 조카는 매번 똑같은 걱정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서는 나를 계속 “선생님”이라 불렀다. 조카가 사는 시설의 아동들은 후원자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는 김 조카와 특별한 관계이고 싶었지만, 녀석은 호칭을 통해 나와 거리두기를 했다.


출생의 비밀을 친구들이 알고 있다면 이렇게 관계나 호칭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김 조카뿐만 아니라 시설의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시설에 산다는 걸 숨겼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알려지면 못된 아이들한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존재했던 것 같다. 다른 종류의 차별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 조카는 아버지가 회사원이라고 속였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진실 알고 있었다. 


김 조카는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아이다. 그래도 마냥 착하기만 하거나 반항기가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학교 얘기를 하다가 선생님이나 어른들한테 반항한 적 있는지 물었다. 딱 한 번 있다고 했다. 교실에서 반 친구의 시계가 없어졌는데, 선생님이 자신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추궁했다는 것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김 조카에게는 알리바이도 있었다. 녀석이 적극적으로 해명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범인이 아닌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심한 상처를 받았다. 그때 처음으로 어른에게 대들었다고 한다.


"내가 부모 없어서 의심하는 거냐고."



그 이후 김 조카는 더 자신의 상황을 숨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고아라는 걸 숨겨 주려는 내 제안은 듣지 않았다. 나는 계속 삼촌이 아닌 선생님으로 불리었다. 그 바람에 나도 가끔 불편한 의심을 받았다. 어느 날은 김 조카와 택시에 탔는데, 택시기사가 우리 대화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모른 척해도 좋을 텐데. 계속 둘이 어떤 관계냐고 캐물었다. 묻는 투가 원조 교제하는 아저씨와 소년을 머릿속에 그리는 듯했다. 선을 넘는 집요한 질문은 내가 언짢음을 드러내서야 종료됐지만, 김 조카의 불성실한 협조는 가끔 나도 곤란하게 만들었다.


김 조카의 졸업식 때도 곤란할 뻔했다. 녀석이 상장과 선물을 받기에 웬일인가 싶었지만 기뻤다. 무슨 상장인지 기대했는데 상장과 선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물상자에 커다랗게 후원단체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조카가 귓속말로 얘기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친구들한테 적당히 둘러댔는데 하마터면 들킨 뻔했어요.”

큼지막한 로고가 박힌 선물이 후원단체의 홍보에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아이들의 비밀이 노출될 위험도 있었다. 좋은 의도라도 그  사업이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갈 수 있다. 상장과 선물의 로고를  나는 바로 알아봤지만,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조카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원단체의 섬세함이 아쉬웠다.


모두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가정사가 주로 그렇다. 시설에 생활하는 아이들은 어떨까? 가정사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아예 가정이 없는 아이들도 있다. 이 아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더욱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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