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조카(녀석은 아직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무척 기뻤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오랜 노력 끝에 이제 마음의 벽을 허물고 하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구나. 꿈 얘기하는구나 싶었다.
후원한 지 2년이 흘러 김 조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있었다. 녀석과 친해지기 위해 잔소리를 안 하려 노력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보는 후원자가 볼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면 만나기 싫을 것 같았다. 나 역시 부모님이 하시는 잔소리를 안 듣는데, 한 달에 한 번 보는 사람이 뭐라고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는가? 그래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시설에 공부할 여건이 갖춰져 있는 거란 기대 역시 없었다.
초등학교 때 어느 정도 성적을 유지하던 조카는 중학교 와서 반에서 꼴찌 앞을 달렸다. 그때도 "꼴찌만 아니면 되지.”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녀석의 미래가 걱정되어 커서 하고 싶은 건 없는지, 좋아하는 과목이 뭔 지 정도는 물어봤다. 그때마다 김 조카는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뭔가를 해보고 싶은 적이 없었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게 가능한가? 뭔가 관심 있는 게 있어야 학원을 보내주던 방법을 찾아볼 텐데. 김 조카는 후원자를 참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성실한 소년이었다. 살갑게 굴지도 않고 고마워한다는 느낌 역시 없었다. 생일선물로 필요한 걸 물어봐도 모르겠다고만 답했다. 그때 나는 잠깐 후원이 참 보람 없고 힘든 것이구나 생각했다.
조카에게 13년 동안 후원자가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가 지쳐서 포기하고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 오기가 생겼다. 내가 너의 마음의 벽을 부숴 보리라.
그러던 와중에 처음으로 요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기쁜 마음에 옛날에 남자가 주방에 있으면 욕먹었지만 요즘은 요섹남이라고 한다며 요리 예찬론을 시작했다. 이연복 셰프나 레이먼 킴을 예로 들며 요리로 성공한 사람들도 쭉 나열했다.
동기가 단순하면 오히려 더 좋을 때도 있다. 나 역시 법원에 들어온 이유가 제복을 입고 싶어서였다. 물론 나는 군인이셨던 아버지처럼 각 잡힌 멋진 제복을 꿈꿨는데, 누이에 속아 그냥 걸치는 검은색 망토(법복)를 입게 되었지만 말이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한다.’ ‘최현석 셰프 소금 뿌리기가 멋져 보였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도 충분하다. 실컷 들떠서 왜 요리를 하고 싶은 지 물었다. 그런데..
"요리 잘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해서요."
녀석의 대답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상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순간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은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이 중학생 소년은 꿈을 꾸고 있었던 게 아니라 생존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다. 시설을 퇴소하면 돈이 없어 굶어 죽을 상황을 머릿속에 가정하며,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판단으로 밥값이 적게 드는 방법. 즉 요리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이곳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경제력이 좋은 국가 중 하나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에서도 시설에서 생활하는 중학생이 걱정하는 미래란 이런 것인가 하는 씁쓸함과 함께 다시 장발장 청년이 기억에서 소환되었다. 시설에서 사는 아이의 꿈은 노숙을 면하는 것인가. 정서적으로 아이들이 꿈꾸기 이만큼 어려운 환경이구나. 그리고 이런 환경에 처한 아이의 마음을 여는 일은 참 어렵구나. 이런 생각들과 함께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