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20일 월요일 -
♡ 프레데리크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발라드 4번 바단조 Op.52 / Ballade No.4, Op.52 in F minor>
■ https://www.youtube.com/watch?v=e1kSNJOReco
오늘 아침 기온이 서울인데도 무려 섭씨 4도까지 떨어졌다. 10월이면 가을이 깊어져 붉은 단풍과 쨍하게 푸른 하늘이 어울려야 하는데, 갑자기 이른 겨울로 건너뛴 느낌이다. 길가 은행나무들도 미처 이런 추위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노란 물도 들지 못한 푸른 은행잎들이 녹색도 갈색도 아닌 어정쩡한 낯빛으로 길거리를 나뒹굴고 있다. 올여름 폭염은 계절의 감각을 잊게 만들더니, 가을조차 늦은 비에 단풍 들 시간조차 주지 않고 나무들의 겨울채비를 다그친다.
세상에 영원(永遠)한 것은 없다더니.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4계절의 규칙마저도 깨져버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 결코 흔들릴 것 같지 않던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질서도 여지없이 무너진다.
요즘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암울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아무래도 내 나이 때문인 듯해서 내 딸을 비롯해 여러 세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진실로 이 세계에는 짙은 절망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오늘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나의 클래식 음악일기 > 브런치 북 3번째 권이 끝난다. 지난 3개월 동안 주말을 제외하고 매주 5일을 연재했는데, 지난 목요일 예고했듯이 내 삶의 속도 조절을 위해 4번째 권부터는 매주 일요일 연재로 바꿀 예정이다. 잠시 쉬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예술'이 주는 위로(慰勞)와 평안(平安)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만약 조물주(造物主)가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조차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인간을 통해 우주를 좀 더 멋지게 만들려는 뜻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ce, 지혜로운 인간)'보다 '호모 아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미적 인간'이라는 뜻으로, 미적 감각과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인간을 의미)'라는 표현이 더 인간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 브런치글은 밤 11시를 넘어서야 쓰기 시작했는데, 자정에 임박해서야 '나의 클래식 음악일기' 3번째 권의 마지막 곡을 골랐다. 낭만주의 음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음악의 본질과 미래에 대해 벌어졌던 소위 '낭만파 전쟁'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음악가 모두로부터 칭송받았던 단 한 명의 음악가, 쇼팽! 그리고 그 쇼팽의 가장 빼어난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발라드 4번이 그 주인공이다.
발라드 4번 F단조 Op. 52는 쇼팽이 완성한 마지막 발라드 작품으로, 19세기 피아노 음악의 정점을 찍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곡이다. 쇼팽의 네 개의 발라드 중에서 기술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연주 시간도 이전 발라드 작품들 중에서 가장 길다.(10~12분)
피아니스트 존 오그돈은 이 곡을 "쇼팽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숭고하고 강렬하며, 위대한 힘을 지닌 곡"이라며 "겨우 12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생의 모든 경험을 담고 있다"며 찬사를 보낸 곡이기도 하다.
쇼팽이 발라드 4번을 완성한 해는 1842년으로 당시 쇼팽의 피아니즘은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1838년 요양차 조르주 상드와 함께 머물렀던 마요르카 섬에서 오히려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더 심해지자 파리로 돌아온 쇼팽과 상드는 1839년부터 매년 파리 남쪽 상드의 시골 영지 노앙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 쇼팽은 정서적으로도 건강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며 뛰어난 걸작들을 쏟아냈다.
F단조 환상곡(1840-41), 뱃노래(1845-46), 폴로네즈 환상곡(1845-46), A플랫 장조 발라드(1840-41), F단조 발라드(1842), B단조 소나타(1844) 등 이 무렵 쇼팽의 작품들은 빼어난 서정성과 구성적 치밀함이 특징인데, 이 시기 쇼팽이 특정한 주제의 아이디어를 더 길고 복합적인 음악적 구성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작품 속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당시 쇼팽은 바흐 시대의 대위법을 익히기 위해 파리의 음악학자들의 관련 논문까지 입수해 공부할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현대의 음악학자들은 오늘 소개하는 쇼팽의 발라드 4번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1권 22번 B플랫단조 전주곡과 푸가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쇼팽이 바흐의 대위법을 단순히 공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작품 속에 녹여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상드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당시 쇼팽의 창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영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치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때로는 괴로워하며 울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면서 수백 번을 고치다가 결국 최초의 아이디어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썼다. 이러한 쇼팽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발라드 4번의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발라드 4번의 가장 독특한 매력은 두 개의 대조적인 주제의 동시적 발전과 상호 얽힘에 있다. 쇼팽은 소나타 형식과 변주 형식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음악적 구조의 복잡성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데, 이를테면 첫 번째 주제선율이 네 번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면서 점점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로 꾸며진다. 이어서 두 번째 선율이 등장하여 첫 번째 주제 선율과 서로 얽히고 어우러지면서, 음악은 점점 복잡해지고 긴장감이 높아진다.
특히 곡 처음 부분의 멜로디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반복되며 감동을 주는데, 음악학자 샘슨은 '이 지점(다시 반복된 주제 부분)에서 두 번째 멜로디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의 음악적 여정은 쇼팽의 가장 마법 같은 솜씨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곡의 마지막 부분 또한 인상적인데, 매우 강한 화음들이 연달아 울려 퍼지다 곡이 끝날 것 같은 순간, 갑자기 조용해지면서(피아니시모) 다섯 개의 화음이 숨을 죽이며 울리다 또 갑자기 극도로 빠르고 격렬한 마지막 부분이 폭풍처럼 몰아친다. 이 마지막 부분은 여러 멜로디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체 곡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음악학자 토마셰프스키는 쇼팽의 발라드 4번에 대해 '이 곡의 이야기는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복잡하게 얽히고 되돌아가며 멈추기도 한다. 마치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처럼 신비롭고 놀라우며 매혹적인 장면들이 계속 펼쳐진다'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발라드'란 장르적 특징과 연결되어 있다.
'발라드(Ballade)'는 라틴어 'Ballare(춤추다)'에서 유래한 프랑스어로, 중세시대 음유시인들이 불렀던 시와 노래의 형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12세기 무렵에는 이러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대중적인 무곡 형식으로 발전했으며, 각 절이 두 개의 악구를 가지고 후렴구가 붙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중세 음악 전통에서 발라드는 '샹송 발라데(chanson balladée)' 또는 '발라드'로 불렸으며, 원래는 춤을 위한 노래였으나 점차 양식화된 독창곡 형태로 발전했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발라드는 유명한 음유시인 아당 드 라 알(Adam de la Halle, 1245-1288)에 의해 유럽 각지에서 불리게 되었는데, 아당 드 라 알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곡가인 트루베르(trouvère, '발명가'란 뜻의 시인 겸 작곡가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로, 단선율과 다성 음악을 모두 작곡한 몇 안 되는 중세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3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문학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평가받아 온 인물이기도 하다.
14세기에는 아르스 노바(Ars Nova) 시대의 음악가들, 특히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가 42개의 발라드를 작곡하며 이 장르를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쇼는 중세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시인으로, 자신의 사랑 시를 비롤레(virelai), 발라드, 론도(rondeau)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작곡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발라드의 변형인 '발라타(ballata)'가 발전했는데, 이 또한 춤을 의미하는 동사 'ballare'에서 유래했으며 일종의 춤 음악, 무곡이라고 볼 수 있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작곡가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1474)와 질 뱅쇼아(Gilles Binchois, 1400-1460)에 의해 발라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음악에 붙여진 가사는 대부분 귀족 부인을 향한 궁정풍의 사랑 노래였다고 한다. 뒤파이와 뱅쇼아는 부르고뉴 학파의 핵심 인물들로, 특히 뱅쇼아는 음악가로서뿐만 아니라 세밀화가로도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는데, 짧고 세속적 샹송들의 작곡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 독일 등지로 퍼진 발라드는 르네상스 시대에까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발라드 장르는 독일의 소위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 시대에 활동했던 시인 실러와 괴테가 옛 전설에서 시상을 얻어 시를 만들고,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는 이들의 시를 바탕으로 피아노 반주가 딸린 독일 가곡으로 만들면서 발라드의 장르적 전통을 이어가게 된다.
쇼팽은 이 발라드 장르를 다시 피아노 연주곡으로 재창조하게 되는데, 쇼팽은 중세의 발라드 개념과 이탈리아 춤곡인 발라타의 아이디어를 결합하고, 여기에 표준적인 소나타 형식의 요소를 섞어 새로운 음악 형태를 만들어냈다. 발라드와 같은 단일 악장 작품들은 뛰어난 연주기교와 풍부한 상상력을 요구한는데, 이는 쇼팽이 '발라드'라는 용어를 발레를 위한 간주곡이나 춤곡의 의미로도 사용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중세의 영웅적 발라드, 즉 종종 환상적 성격을 띠는 서사적 음유시인의 노래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쇼팽의 발라드는 스케르초처럼 고전의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폴로네즈처럼 향토적 요소를 규정하는 음악 형식도 아니었다. 발라드의 형식은 자유로웠으며, 다만 4곡 모두 3박자 계통(1번은 6/4박자, 나머지 3곡은 6/8박자)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만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쇼팽은 음악과 시로 구성된 발라드를 추상적인 음악 형식으로 재탄생시킨 개척자였으며, 소나타 형식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두 주제를 재현부에서 역순으로 제시하는 '거울 재현(mirror reprise)' 같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 변형된 소나타 형식을 사용한 혁신가였다.
쇼팽이 발라드를 쓰게 된 계기는 친구이자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로베르트 슈만의 회고에 따르면, 쇼팽은 슈만에게 자신의 발라드들이 미츠키에비치의 "몇몇 시들(certain poems)"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미츠키에비치는 19세기 폴란드의 저명한 시인으로, 쇼팽과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정치적 격변을 피해 파리로 망명해 있었다.
쇼팽과 미츠키에비치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쇼팽 자신이 말하기도 했듯이 미츠키에비치의 시적 발라드들에서 영감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각 발라드와 특정 시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음악학자들은 발라드 1번은 미츠키에비치의 "콘라드 발렌로드(Conrad Wallenrod)"에서, 발라드 2번은 "윌리스의 호수(Lake of Willis, 또는 Świtezianka)"에서, 발라드 3번은 "물의 요정(Undine)"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쇼팽은 슈만처럼 표제음악적 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청중들이 자신의 음악을 각자의 방식으로 감상하길 바랐다고 한다.
1836년 슈만은 자신의 일기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에 대해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그의 발라드를 가장 좋아한다"라고 했고, 이후 1841년 그의 음악 평론에서 발라드 1번을 "쇼팽의 가장 거칠고(wildest) 가장 독창적인(most original) 작품들 중 하나이며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곡"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836년 9월 12일, 쇼팽이 라이프치히에 있는 슈만을 방문했을 때, 쇼팽은 두 개의 새로운 작품을 연주했는데, 그중 하나가 발라드였다. 슈만은 쇼팽으로부터 발라드 1번 G단조의 악보를 선물로 받았으며, 흥미롭게도 쇼팽은 이 방문에서 아직 출판되지 않은 발라드 2번도 연주했는데, 이 버전은 나중에 출판된 것과는 다른 형태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슈만은 쇼팽에게 자신의 "크라이슬레리아나(Kreisleriana)" Op. 16을 헌정했으며, 헌정 페이지에 "나의 친구(my friend)"라고 적었다. 쇼팽은 이에 보답하여 발라드 2번 F장조 Op. 38을 슈만에게 헌정했지만, 훨씬 더 격식을 차려 "로베르트 슈만 선생님(Mr. Robert Schumann)에게 헌정"한다고 명시하고, (아마도 의도적으로) 우정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 사이의 다소 어색한 관계를 보여주는데, 슈만은 쇼팽의 음악에 대해 열광적으로 찬사를 보냈지만, 쇼팽은 슈만의 작품에 대해 좀 더 냉정한 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쇼팽의 슈만에 대한 박한 평가 이면에는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였던 소위 '낭만파 전쟁'이라는 다소 험악한 논쟁이 있었다. 좀 길지만, 짧게 정리해 옮겨본다.
19세기 중반 독일과 중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낭만파 전쟁(War of the Romantics)"은 음악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미학적 논쟁 중 하나였다. 이 분쟁의 핵심은 음악의 본질과 미래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 특히 음악 구조, 반음계적 화성의 한계, 그리고 표제음악 대 절대음악의 대립이 주요 쟁점이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립하는 두 진영이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베토벤 이후 독일 음악의 정통성을 누가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경쟁이기도 했다.
산업혁명과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음악의 사회적 역할이 변화하면서, 작곡가들은 전통적인 귀족 후원 시스템에서 벗어나 대중과 직접 소통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콘서트홀의 확산과 음악 출판업의 발달은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완성도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음악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했으며, 전통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혁신을 추구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했다.
베토벤의 죽음(1827) 이후 독일 음악계는 그의 거대한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 상반된 접근방식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베토벤의 형식적 완성도와 구조적 논리를 계승하려는 보수적 접근이었고, 다른 한쪽은 베토벤의 감정적 표현력과 혁신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려는 진보적 접근이었다. 이러한 음악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1850년대에 이르러 공개적인 논쟁으로 발전하면서 낭만파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보수진영의 중심에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있었으며, 그를 둘러싸고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 로베르트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 슈만, 그리고 펠릭스 멘델스존이 설립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이 든든한 지지 기반을 형성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형식미와 절대음악의 가치를 옹호했으며, 음악 자체의 순수성을 해치는 외적 요소들의 개입을 경계했다. 요아힘은 이 진영의 이론적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신독일학파가 끼치는 악한 영향"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리스트적 환상곡에서 자라나는 비열하고 비참한 잡초들"이라고 혹독하게 평가했다.
진보진영은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프란츠 리스트가 핵심 인물이었고 리하르트 바그너가 또 다른 지주 역할을 했다. 이들을 지지하는 인물로는 음악 평론가 리하르트 폴, 작곡가 펠릭스 드레제케, 율리우스 로이브케, 카를 클린트보르트, 페터 코르넬리우스 등이 있었다. 특히 리하르트 폴은 리스트에 의해 바이마르의 전속 평론가로 초빙되어 리스트, 베를리오즈, 바그너를 지면에서 옹호하면서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 무표제성 이론에 정면으로 맞섰다.
흥미롭게도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처음에는 리스트-바그너 진영을 지지했으나, 리스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코지마가 바그너와 사랑에 빠져 떠나자 브람스 진영으로 전향했다. 뷜로는 브람스를 "3B"(바흐, 베토벤, 브람스)의 세 번째 인물로 칭하며 그의 교향곡 1번을 베토벤의 "제10교향곡"이라고 불렀다. 사랑의 배신이 음악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바꿔버린 셈이다.
보수진영은 음악의 자율성과 절대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으며, 음악은 그 자체로 완전한 예술 형태라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음악은 어떤 외적 프로그램이나 문학적 내용에 의존할 필요 없이 순수한 음향 구조와 형식적 논리만으로도 충분한 감동과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본 것이다. 브람스는 이러한 철학을 구현한 대표적 작곡가로서, 고전적 형식들 -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현악 사중주 등 - 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C단조는 이 진영의 미학적 이상을 완벽히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21년에 걸쳐 완성한 이 작품은 베토벤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인 음악 언어를 보여준다. 특히 신비로운 도입부와 점진적 긴장 고조, 그리고 마지막 악장의 장엄한 클라이맥스는 전통적 교향곡 형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브람스의 피아노 작품들, 특히 헨델 변주곡은 바그너도 인정할 정도로 전통적 형식 안에서의 혁신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클라라 슈만은 이 진영의 중요한 이론적 지지자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연주가로서 보수진영의 음악적 가치를 대중에게 전파했다. 요아힘의 바이올린 연주와 해석은 절대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모범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작품의 순수한 음악적 구조를 부각하는 연주 스타일을 추구했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이러한 보수적 가치관의 교육적 거점 역할을 했으며, 체계적인 화성학과 대위법 교육을 통해 전통적 작곡 기법의 전수에 주력했다.
진보진영은 음악이 시, 회화, 문학과 같은 다른 예술 형태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종합적인 예술 경험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리스트는 이러한 철학을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구현했으며, 이는 단일 악장으로 이루어진 관현악 작품으로 특정한 시적, 회화적, 또는 문학적 내용을 음악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전주곡", "타소", "마제파" 등은 각각 라마르틴의 시, 괴테의 드라마, 빅토르 위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다.
바그너는 더 나아가 "미래의 음악(Zukunftsmusik)"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오페라를 총체예술작품(Gesamtkunstwerk)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이러한 이상의 최고 실현체로서, 음악, 드라마, 시각예술, 무용이 완벽하게 통합된 새로운 예술 형태를 제시했다. 바그너는 또한 라이트모티프(leitmotif) 기법을 통해 음악적 상징체계를 구축했으며, 이는 후에 영화 음악의 발전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들은 기존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적 연주 기법을 요구했으며, 특히 "초절기교 연습곡"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시켰다. 그의 연주회는 당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전례 없는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여성들이 실신할 정도의 감동을 주는 "리스트 마니아" 현상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르투오소적 접근은 음악을 귀족의 살롱에서 대중의 콘서트홀로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0년대 후반부터 양 진영 간의 갈등은 공개적이고 격렬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으며, 이는 작품뿐만 아니라 글과 연주회장에서의 실제 소동으로까지 이어졌다. 1859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초연에서는 의외의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는데, 보수진영의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야유를 보낸 반면, 신독일학파 지지자들은 오히려 이 연주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는 낭만파 전쟁이 단순히 보수와 진보로만 음악적 진영이 나눌 수 없는 복잡한 문제임을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바이마르 진영은 로베르트 슈만의 고향인 츠비카우에서 "노이에 차이트슈리프트" 창간 기념행사를 열면서 의도적으로 클라라 슈만을 포함한 보수진영 인사들을 초대하지 않는 공개적 모욕을 가했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미학적 차이를 넘어서는 개인적 적대감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바그너는 그의 에세이 "지휘에 관하여"에서 보수진영을 "메시아를 기다리는 음악적 금주회"라고 조롱했으며, 이들을 "유령 정당(posthumous party)"이라고 불러 이미 죽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1860년 브람스, 요아힘, 율리우스 오토 그림, 베른하르트 숄츠는 "신독일학파에 반대하는 선언문"을 작성하여 공개적으로 리스트와 바그너 진영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이 의도보다 일찍 언론에 공개되면서 서명자가 4명에 그쳐 오히려 보수진영의 약세를 드러내는 역효과를 낳았는데, 이 사건은 공개적 논쟁이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양 진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실제 음악적인 영향 관계는 훨씬 복잡하고 상호적으로 나타났다. 브람스는 공개적으로는 바그너를 비판했지만 사적으로는 "나는 최고의 바그너리안"이라고 고백했으며, 실제로 바그너의 "라인골드" 악보를 자신의 피아노 위에 항상 올려두고 있었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에서는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신들의 황혼"에 대한 명확한 인용구들을 찾아볼 수 있어, 그에 대한 음악적 성취에 대한 경의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바그너 역시 브람스의 재능을 인정했는데, 브람스가 "헨델 변주곡"을 연주했을 때 "누군가 전통적 형식들을 어떻게 다룰 줄 안다면 아직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883년 바그너의 부고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리허설을 중단하고 "오늘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겠다. 거장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엄숙히 선언했는데, 이러한 상대진영 거장에 대한 상호 존중은 공개적 대립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리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 모순을 보여주었는데, 1859년경부터 교회 음악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면서 보수적인 가톨릭 교회의 이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는 바그너가 극도로 혐오했던 마이어베어의 음악에 대해서는 오페라 피아노 편곡을 작곡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역설적인 것은 리스트의 교향시 개념이 바그너의 "미래의 예술작품"에서 제시한 음악 드라마 이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낭만파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적 적대감은 누그러졌지만, '클래식 음악'과 '현대 음악' 사이의 명확한 구분선을 그었다는 점에서 음악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범주 구분은 비록 정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보수진영이 추구한 절대음악의 전통은 브람스 이후에도 막스 레거, 후기 낭만파 교향곡 작곡가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20세기 신고전주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진보진영의 혁신들은 더욱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 기법은 후기 낭만파와 인상주의, 나아가 무조 음악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리스트의 교향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등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20세기 영화 음악의 직접적 모태가 되었다. 특히 라이트모티프 기법과 프로그램 뮤직의 개념은 현대 멀티미디어 시대의 음악 창작에서 핵심적 요소로 자리 잡았다.
교육적 측면에서도 이 논쟁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음악 교육이 단순한 기능 전수를 넘어서 미학적, 철학적 사고를 포함하는 종합적 예술 교육으로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61년 설립된 "전독일 음악 연맹(ADMV)"은 리스트의 진보적 이상을 실현하는 조직으로 기능했으며, 이후 현대음악 축제와 전위 음악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의 구축은 20세기 다양한 음악적 실험들이 체계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쇼팽은 낭만파 전쟁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음악적 혁신과 특성이 양 진영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진영에게 쇼팽은 전통적 형식 내에서의 완벽한 혁신 사례였는데, 특히 그의 발라드, 소나타, 협주곡들은 고전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쇼팽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화성적 대담함과 리듬적 복잡성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쇼팽의 마주르카와 폴로네즈에서 보여준 민족 음악 소재의 예술적 승화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과 독일 민요 편곡에 직접적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진보진영에게 쇼팽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시킨 혁신가였으며, 특히 그의 독창적인 연주 기법과 페달 사용법은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스타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쇼팽이 개발한 루바토 기법과 감정적 표현법은 리스트가 추구한 극도의 개성적 연주 스타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쇼팽의 야상곡들이 보여주는 시적 분위기와 내적 성찰은 리스트의 "순례의 해"와 같은 프로그램적 작품들의 감성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쇼팽의 화성적 혁신은 양 진영 모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그의 반음계적 화성법과 원거리 조성으로의 전조 기법은 전통적 조성 체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수진영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화성적 대담함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보여준 극도의 반음계주의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쇼팽의 전주곡들에서 나타나는 조성 중심의 모호함과 화성적 긴장감은 후기 낭만파 화성 발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쇼팽이 양 진영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피아노 음악의 시적 가능성을 실증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어떤 문학적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수한 음악적 수사법만으로 깊은 감동과 시적 연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줬으며, 이는 절대음악의 옹호자들에게는 음악 자체의 완전성을, 진보진영에게는 음악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각각 입증해 주었다. 결국 쇼팽의 음악은 낭만파 전쟁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시했으며, 이는 후에 드뷔시와 라벨 같은 인상주의 작곡가들이 추구한 "순수한 음향의 시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의 후반부에서 피아니스트 스필만(에드리언 브로디 분)이 폐허가 된 바르샤바의 건물에 숨어 지내던 중, 독일군 장교 빌름 호젠펠트(토마스 크레치만 분)에게 발견되고, 이어 독일장교가 "당신은 뭐 하는 사람이오?"라고 묻자 스필만이 "전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였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장교의 요청으로 스필만이 연주했던 곡이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였다. 나중에 독일군 장교가 스필만에게 빵과 물을 전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때의 감동을 되살리면서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로 감상해 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mxx_WcjV5U8&list=RDmxx_WcjV5U8&start_radio=1
■ 쇼팽의 발라드 1번부터 4번까지 전곡을 다시 짐머만의 피아노 연주로 감상해 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cqkRV6cALkA&list=RDcqkRV6cALkA&start_radio=1
♥ 음악의 향기
- 이해인
좋은 음악을 들을 땐
너도 나도 말이 필요 없지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강으로 흐르는 음악은
곧 기도가 되지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이해하면
사랑의 문이 열리지
낯선 사람들도
음악을 사이에 두고
이내 친구가 되는
음악으로 가득 찬 집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향기 날리며
고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