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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할 수 없는
'어른의 전달력'을 전달하는 지혜는?

리처드 로티와 롤랑 바르트가 ‘브리꼴레르’를 찾아간 까닭은?

프롤로그

전달할 수 없는 '어른의 전달력'을 전달하는 지혜는?

리처드 로티와 롤랑 바르트가 ‘브리꼴레르’를 찾아간 까닭은?


어른의 전달력은 결론부터 말하면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어른의 전달력은 어른들이 지금 까지 산전수전 겪어본 경험으로 체득한 삶의 지혜를 지금 시점에서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정리된 진실을 ‘몸의 언어’로 전달하는 능력이다. ‘몸의 언어’는 몸으로 겪어본 경험의 정수를 드러내는 데 적확한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는 가운데 비로소 드러나는 언어다. ‘몸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와 다르게 경험적 지혜를 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내 몸에 있는 언어 꾸러미로 경험적 깨달음의 진수(眞髓)를 가급적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탄생하는 언어다. 경험이 언어로 번역되면서 언어로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는 감각적 깨달음이나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느낌 또는 감정이나 정서는 여전히 언어적 진술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강렬하게 깨달으며 전율하는 감동적인 경험을 했지만, 그 경험으로 깨달은 삶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 수시로 직면한다. 어른의 전달력도 같은 맥락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다. 내가 겪어본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삶의 교훈이나 지혜를 독특한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언어가 부족하거나 부재해서 아무리 표현을 해도 아직까지 가슴에 콕 박혀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경험이나, 왠지 모르게 끌리는 삶의 지혜 덩어리가 있다. 내가 겪어본 경험으로 깨달은 삶의 지혜는 이거야라고 명약관화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묘하게 내 안에 숨어서 빛나는 광물 속의 광채와 같은 미지의 보석이 내 몸의 어딘가에 기억으로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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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휴먼 브랜드다


전달할 수 없는 어른의 전달력을 그렇다면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까. 딜레마에 처한 질문이다. 전달할 수 없는 전달력을 전달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성공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익히는 것이라고 《코나투스》에서 말했듯이 전달력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익히는 것이다. 다양한 전달 전략이나 기법을 익힌다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는다. 전달하는 다양한 무대 위에서 몸소 겪어보는 가운데 몸에 각인되는 깨우침만큼만 전달력도 개발된다. 전달의 고수에 이르는 길, 즉 ‘마스터리(mastry)’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미스터리(mystery)’다. 내가 깨달은 삶의 진실이나 지혜를 고스란히 언어로 번역해서 전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전달력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전달은 전달자의 삶과 무관하게 진공관과 같은 실험실에서 전달 기법을 익힌다고 생기는 능력이 아니다. 삶이 곧 메시지인 사람이 전달할 때 전달력은 전달 기법이나 기교와 관계없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간다. 전달력은 전달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자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내가 살아본 삶만큼 전달할 수 있다. 어제와 다르게 전달하려면 어제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전달은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휴먼 브랜딩 과정과 닮아있다. 삶이 메시지인 사람이 전달할 때, 그 전달은 곧 휴먼 브랜드가 된다. 삶과 메시지, 그리고 브랜드와 전달은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다. 전달력의 깊이와 넓이는 삶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한다.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 대체 불가능한 원본 브랜드가 되는 게 그게 바로 휴먼 브랜드다. 사람이 곧 브랜드가 되는 거다.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자기답게 살아가는 자기다움이 가장 아름다운 휴먼 브랜드가 되고 그 사람의 삶은 곧 가장 강력한 어른의 전달력으로 작용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대체불가능한 원본의 삶이 보여주는 휴먼 브랜딩 파워다. 오로지 그 사람만이 전달할 수 있는 컬러나 스타일은 스킬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 담진 진심과 진정성의 문제다. 내가 하면 돋보이는 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했을 때 전율하는 행복감을 느끼는 일, 내가 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 일, 내가 해냄으로써 그 덕분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지는 느낌이 드는 일,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나의 존재 목적에 부응하는 일, 오늘보다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를 따라 노력하며 능력이 신장되는 일,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을 때 가장 돋보이고 어울리는 일, 시작하기도 전에 심장이 뛰면서 성패에 관계없이 과정을 통해 내가 성장한다는 느낌이 드는 일이 바로 《코나투스》에서 말하는 대체 불가능한 원본으로 살아가며 하는 일이다. 오늘보다 더 잘하고 싶은 기쁨의 정서가 흐르는 길에는 《2분의 1》에서 말했던 다리 떨리는 일은 절반으로 줄이고 심장 뛰는 일은 두 배로 늘리는 방법이 숨어 있다. 2분의 1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인생 후반전을 코나투스를 따라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절반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습관적으로 해왔지만 끊어야 할 일을 절반으로 줄이고(1/2), 좋은 습관이나 아직 하지 않았던 일을 두 배로 늘리면(2), 1/2 X 2 = 1(대체불가능한 유일한 나)이 되는 삶이다.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원본이 되기 위해 진실의 뒤안길을 걸으며 생긴 ‘눈먼 각인’의 흔적에 담긴 ‘무딘 의미’를 파고들며 어제와 다르게 해명하고 해석할 때 어른의 전달력은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마스터리의 경지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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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눈먼 각인’에 숨어 있는 투박한 ‘무딘 의미’를 전달하는 브리꼴레르다


이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한 가지 대안을 리처드 로티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말하는 ‘눈먼 각인’에 잠재된 롤랑 바르트의 ‘무딘 의미’(참고: 《이미지와 글쓰기》)를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말하는 《브리꼴레르》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눈먼 각인’과 ‘무딘 의미’, 그리고 ‘브리꼴레르’라는 개념은 어른의 전달력의 본질은 무엇인지, 왜 전달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지를 설명하기 위해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 어른의 전달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강렬한 추억으로 새겨져 있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눈먼 각인’으로 시작한다. 누군가를 만나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그 당시 대화 속에서 깨달은 촌철살인의 통찰도 ‘눈먼 각인’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만나 인두 같은 문장에 폐부를 찌르면서 이제껏 믿었던 통념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앎의 상처가 생기는 순간에도 ‘눈먼 각인’으로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사업을 하다 크게 실패했지만 돌이켜 반성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사업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 제공자를 배우면서 색다른 실력을 쌓는 계기도 내 몸에 ‘눈먼 각인’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런 눈먼 각인은 롤랑 바르트의 ‘무딘 의미’로 다양한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눈먼 각인’이 전해주는 교훈도 해석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놓인 상황에 따라 하나의 정답으로 설명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대안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한 가지 정답으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전달력보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청중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답을 찾을 미완성의 형태로 여지를 남기는 전달력의 가능성이다. ‘무딘 의미’는 결국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꼴레르’라는 어른을 만나야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브리꼴레르는 관념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축적해서 쌓은 전문성으로 무장한 책상 똑똑이(Book Smart)가 아니다. 브리꼴레르는 무딘 의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수립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신의 경험적 지혜와 현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이나 도구를 활용해서 의미의 뒤안길을 몸을 던져 파고들어 가는 실전형 인재(Street Smart)다. ‘브리꼴레르’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전달전략을 개발하는 실전형 방법개발전문가다. 브리꼴레르가 믿는 전달력의 지혜는 책상에서 전문 지식을 습득한다고 생기지 않고 이리저리 시도하면서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시도하고 모색하면서 대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몸으로 체득되는 정당화된 신념이나 용기와 열정으로 체화된 겸손한 자신감의 다른 이름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눈먼 각인’에 숨어 있는 투박한 ‘무딘 의미’를 현존하는 다양한 방법과 가용한 언어 꾸러미를 동원해서 이리저리 전달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판단착오를 줄여나가는 브리꼴레르의 안간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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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각인’은 설명하기 어려운, 내 몸에 새겨진 앎의 사각지대다


‘눈먼 각인’은 교양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 자국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의 어떤 자극이나 인상이 내 몸에 강렬하게 아로새겨졌지만 그것의 의미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앎의 사각지대다. 어른의 전달력으로 전달하고 싶은 어른의 지혜도 ‘눈먼 각인’ 상태로 몸에 체화되어(embedded) 있다. 성장하면서 받아들인 수많은 개념이나 언어, 믿음이나 가치관은 누구나 믿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 사회나 문화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에 ‘새겨져서’ 별다른 의심 없이 문화적 전통양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생긴 ‘눈먼 각인’이다. 내 몸에 대강 언제쯤 무슨 일로 어떤 경험을 하다 무의식적으로 내 몸으로 침입해 앎의 상처를 만들었지만, 그 상처로 생긴 삶의 지혜가 어떤 이미지인지는 대강 알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설명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이나 따르는 가치관, 우리가 공유하는 공통의 도덕이나 윤리도 절대적인 가치나 확고한 기반으로 생긴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어떤 목적이나 편의에 따라 만들어 놓고,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전승되어 왔을 뿐이다. 어느 시대나 통용되는 객관적인 진리는 없으니 그걸 찾아내려고 애쓰지 말고 우리가 언제부터 그걸 진리라고 합의하고 수용하기로 했는지, 그게 여전히 지금 시대에도 통용되는 진리이자 우리가 모두 따라야 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인지는 의심해봐야 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바로 ‘눈먼 각인’에 눈이 멀지 말고 이전과 다른 눈으로 ‘눈먼 각인’에 눈길을 보내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눈먼 각인’은 우리가 어떤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각인되고 다른 판단과 행동을 요구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와 다른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우리와 또 다른 ‘눈먼 각인’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음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 옳다고 믿는 ‘눈먼 각인’의 상태를 감지하고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른 ‘눈먼 각인’을 당연한 신념이나 가치관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눈먼 각인’은 한 번 각인되면 영원히 불변하는 지각이 아니라 또 다른 ‘눈먼 각인’으로 대체될 수도 있고, 기존의 ‘눈먼 각인’을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침묵은 금”이라는 명제로 각인되었지만, 지금 “침묵은 금”이라는 ‘눈먼 각인’은 침묵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일리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침묵은 더 이상 금이 아니기에 적당한 시기에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펼쳐내지 않으면 침묵은 무용한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고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도 있다. 리처드 로티가 ‘눈먼 각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눈먼 각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눈이 멀지 말고, ‘눈먼 각인’에 숨겨진 의미를 시대적 맥락에 비추어 재해석해보고,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신봉했던 통념의 터전이 아닌지를 재고해 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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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눈먼 각인’에 숨어 있는 투박한 ‘무딘 의미’를 전달하는 브리꼴레르다


삶은 크고 작은 도장(圖章)이 수시로 찍히는 도장(道場)이다. 길을 걸어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책을 읽다가 강렬한 인두 같은 문장을 만나, 그 의미가 이미지로 각인될 수도 있고,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간판 이름이 깊은 지각의 밑바닥을 건드려 돌이킬 수 없는 앎의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불시에 급습하는 감각적 느낌이나 지각적 통찰의 언저리에 맴돌다 쾅! 하고 내 몸에 찍히면서 남기는 흔적, 그 감각과 지각의 도장(圖章)이 모여서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눈먼 각인’이 몸에 아로새겨진다. 삶의 무도를 배우는 무대인 도장(道場)에 돌이킬 수 없는 강렬한 지적 자극이 우리의 의지나 선택과는 무관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스치듯 우연하게 도장(圖章)으로 새겨질 때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지혜가 농밀하게 축적된다. 이렇게 남겨진 삶의 지혜는 한 두 마디로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무딘 의미’의 형태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과 함께 애매모호한 이미지로 스며든다. 리처드 로티의 ‘눈먼 각인’은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무딘 의미’가 서식하는 텃밭이다. ‘눈먼 각인’에서 자라고 있는 다양한 경험적 깨달음의 흔적이나 얼룩,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침투되어 의식상태로 자리 잡은 가치관이나 진리에 대한 신념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의미 덩어리들이 곳곳에 터를 잡고 자란다. 어른의 전달력의 관건은 결국 ‘눈먼 각인’이라는 텃밭에 자라는 ‘무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면서 그것이 품고 있는 다층적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여지를 열어주는 데 있다.


‘눈먼 각인’이 왜 ‘무딘 의미’를 자라게 할 수밖에 없는 텃밭일까? 인생에는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른들의 지혜도 한 가지 정답으로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층위가 다양한 의미를 품고 거주하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삶의 진실은 뭉툭하고 모가 났던 돌이 무수한 파도의 움직임에 닳고 닳아 모가 없어지고 둥글둥글해진 몽돌과 닮았다. 거칠고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은 사라지고 무뎌진 지각의 모서리처럼 보이는 듯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인고의 시간과 의미가 숙성된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의미의 뒤안길에 숨어 있다. 어른의 전달력이 직면한 딜레마는 ‘눈먼 각인’에 잠자고 있는 ‘무딘 의미’의 지혜를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가공해서 전달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다. ‘무딘 의미’에 살아 숨 쉬는 어른들의 지혜를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은 단 하나의 프로세스나 매뉴얼로 정리해서 전달할 수 없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어른이 던지는 한 마디가 폐부를 찌르며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살아가야겠다는 교훈적 메시지이자 뜻밖의 순간에 갑자기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깊게 새겨진다. 하지만 그 말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특별한 뜻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 당시 그 말을 했을 때의 표정이나 톤에 비추어 보면 체중이 실린 진심이 느껴질 때가 있다. 툭 던진 짧은 탄식, 때로는 뜬금없는 비유, 어쩌면 투박한 침묵,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설명 불가능한 ‘무딘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삶의 방향을 일깨울 때가 있다. 롤랑 바르트가 ‘무딘 의미’라고 했던 그 순간처럼, 언어로 다 포착할 수 없는, 오직 마음으로만 읽히는 지혜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계량화시켜 평가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과학적 지식만으로 일방적으로 전달해 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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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딘 의미’는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의미다


롤랑 바르트의 ‘무딘 의미’가 건네는 지혜는 ‘이래라저래라’ 같은 명확한 조언(제1의 의미: 정보적 의미)이나,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와 같은 상투적인 비유(제2의 의미: 상징적 의미)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한계나 무리가 있어서 가끔은 이유 없이 따뜻한 눈빛으로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거나, 어쩔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반응은 그저 마음을 연 상태로 툭 던지는 짧은 한숨이 될 수도 있다. 본질에서 벗어나기는 하지만 때로는 엉뚱한 농담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속뜻을 담아 깊은 울림을 줄 때도 있다. 이처럼 ‘무딘 의미’는 모든 삶의 지혜를 객관적으로 분명한 언어적 매개체로 다를 놓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할 말은 많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언어적으로 떠오르지 않을 때, 깊은 한숨으로 난국을 돌파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가 무딘 의미에 담긴 의미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밝혀주는 강력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가슴에 와닿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의미의 결이 ‘무딘 의미’의 진정한 의미다.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듯이, 어른들의 지혜는 종종 이런 ‘무딘 의미’의 형태로 우리의 내면에 직접 스며들어 직접적이고 강렬한데,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메시지의 의미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무딘 의미’는 현재의 지적 인식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일종의 감각적 자각이자 느낌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는 동시에 미끈하고 도망가버리는 제3의 의미라고 한다. 흔히 정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정보는 노골적이라서 의미를 뒤에 숨기지 않고 다 보여준다. 이런 의미가 제1의 의미다. 제2의 의미는 상징적 의미다. 신호등의 빨간 불은 멈추라는 의미이고 파란불은 계속 가라는 의미다. ‘무딘 의미’는 제1의 의미도 아니고 제2의 의미도 아닌 제3의 의미다. 텍스트나 메시지를 정답처럼 단 하나의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누가 어떤 맥락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해되는 의미다. ‘무딘 의미’는 기존의 앎으로 판단할 수 없어서 내가 갖고 있는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다. 이미지에 미지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객관적 의미 너머의 주관적이고 모호한, 해석의 여지가 넓은 의미를 뜻한다. ‘무딘 의미’는 분명하게 한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두리뭉실한, 혹은 의도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의 의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슨 말인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것에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심장에 꽂혀 의미심장해지는 의미가 많아졌다. ‘무딘 의미’로 박힌 ‘눈먼 각인’들이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삶의 디딤돌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노력의 일환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으로 이루고자 하는 작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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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꼴레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건네려고 노력하는 어른이다


‘눈먼 각인’들은 사전에 공부한 정교한 이론이나 완벽한 논리 속에서 탄생한 게 아니라 우연히 새겨져 아직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지혜의 보물이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농담처럼, 때로는 깊은 한숨처럼, 때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 속에 새겨진 삶의 얼룩과 무늬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확한 언어로 설명하려 해도 여전히 안갯속에 휩싸여 있고, 의미의 실체를 포착하려고 해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미하고 모호하지만 강렬한 추억의 단편으로 남아있는 희로애락의 흔적이다. 어른의 존재이유는 ‘눈먼 각인’에 숨어 있는 ‘무딘 의미’의 정체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밝혀낸 다음 우리에게 어떻게든 전해주려 애쓰는 데 있다. ‘무딘 의미’의 상태로 잠자고 있는 ‘눈먼 각인’들을 시대역사적으로 재해석,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필사적이면서도 솔직하게 전달하려는 모습이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레르’랑 너무 닮아있다. 철저한 준비와 계획보다 미래의 언젠가 쓰일지도 몰라서 꾸준히 축적해 온 경험의 깊이와 넓이, 이를 전달하기 위해 체득한 갖가지 삶의 지혜를 끌어모아 이리저리 맞춰가며, 투박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건네려고 노력하는 어른이 바로 ‘브리꼴레르’다.


어른의 전달력은 어딘가 학원이나 학교에서 일정기간 훈련이나 교육을 받으면 늘어나는 지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어떻게 연마하고 수련하면 고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경지가 어떤 모습이며, 사전에 어떤 목표를 설정하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마치 때가 되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지만, 아이는 누가 어른인지 모르는 상태로 살다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어른의 전달력은 사전에 목표와 목표달성 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공부를 하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의 경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이르려는 불가능한 꿈을 품고 묵묵히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어른의 전달력이 꿈꾸는 목적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어른 아이로 살아갈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른이 되려고 꿈꾸는 것처럼 어른의 전달력이 어떤 궁극의 노력과 능력을 요구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눈먼 각인’에 숨겨져 있는 ‘무딘 의미’를 어제와 다르게 해석해서 전달하려는 ‘브리꼴레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어제와 다르게 전달하고 싶으면 어제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내가 겪어본 삶의 깊이와 넓이만큼 어른의 전달력도 깊어지고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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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꼴레르’는 삶으로 앎을 재단하는 지행합일의 전형이다


‘브리꼴레르’ 어른들은 이 ‘무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정교한 계획이나 고급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삶이라는 거대한 잡동사니 창고에서 찾은 모든 것들을 호출해서 디양한 상황에 걸맞은 재료로 사용한다. 지나간 실수들, 사소한 성공 경험,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 고생했던 순간의 표정, 투박한 손짓이 브리꼴레르가 삶의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하는 모든 수단과 도구다. 이 모든 게 어른들이 축적한 삶의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자 재료가 된다. 어른들은 자신이 가진 삶의 파편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보고, 즉흥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며 지혜를 전달한다. 마치 집에 있는 재료들로 뚝딱뚝딱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할머니처럼, 현재 가용한 재료를 활용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브리꼴레르적인 방식을 몸에 익힌 것이다. 브리꼴레르는 앎으로 삶을 재단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의 대가들이 아니라 삶으로 앎을 증명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전형이다. 브리꼴레르는 이론적으로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지혜를 가장 진솔하고 솔직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래서 어른의 전달력은 다듬어지지 않고 정교해 보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진정성은 그 어떤 정교한 전달력보다 강력하게 우리 마음에 박히는 까닭이다. 서툴고 어눌하지만 산전수전 몸으로 겪으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를 자기만의 언어로 전달할 때 ‘무딘 의미’ 속에 갇힌 의미심장함도 서서히 베일을 벗을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는 어떤 학자가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얻은 피땀 어린 경험적 교훈이다. 리처드 로티가 말한 ‘눈먼 각인’처럼, 그들 자신도 "아하!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정확히 알고 받아들인 게 아니라, 삶의 우연한 순간순간에 의도치 않게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혀버린 흔적과 얼룩이다. 자신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런 의미로 나에게 다가와 나에게 깊은 앎의 상처를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눈먼 각인’처럼 얻은 지혜를 남에게 명확하게 '강의'하듯이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럴 때 어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가용한 언어 꾸러미 안에서 적확한 언어를 찾아 당시의 상황을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동반되는 느낌이나 정서를 연상하면서 표현해 보려고 애를 쓴다. 진정한 어른은 자기가 경험적으로 얻은 ‘눈먼 각인’ 속에 담긴 모호한 ‘무딘 의미’와 같은 지혜를 어떻게든 후세에게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지만 사실은 이걸 전달하는 완벽한 매뉴얼이나 절차 또는 프로세스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이때 어른들이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레르’처럼,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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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꼴레르’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보다 문제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문제를 푼다


브리꼴레르는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수립한 다음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하지 않는다. 브리꼴레르의 위력은 생각지도 못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매뉴얼을 참고로 난국을 돌파하는 노하우를 찾아 헤매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 직면한 문제상황의 본질을 읽어낸 다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자원과 지식을 빠르게 점검한 다음, 곧바로 문제 상황과 가용한 자원이나 도구, 지식을 활용해서 이리지리 시도하며 최상의 대안을 찾아 나선다. 어떤 일을 언제 어떻게 할지를 사전에 결정해 봐야 그런 사전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불확실한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어른의 전달력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겪어보는 가운데 생긴 경험적 지혜의 힘은 ‘눈먼 각인’ 상태로 잠재되어 있다가 그것의 의미를 파헤쳐 전달하려는 순간 ‘무딘 의미’의 텃밭에서 각양각색으로 자라는 천차만별의 미지의 의미들이 저마다의 이미지로 드러나지만 도대체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다. 이때 브리꼴레르는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무딘 의미’ 속에 자라는 미지의 세계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옛날이야기는 ‘무딘 의미’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 의미의 핵심을 찌르면서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밝혀주지 못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다양한 비유법이나 명언을 동원, ‘무딘 의미’가 가리고 있는 숨은 의미의 뒤안길을 비춰주는 방법을 찾아보기도 한다.


정해진 로드맵이나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른의 전달력을 드높이려는 브리꼴레르는 즉흥적이고 투박하지만 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적용하면서 점검하고 평가해 보고 다시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 본다. 브리꼴레르는 시행착오를 겪다 마침내 완벽하게 정제된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총체적인 지혜를 전달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오늘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방법 역시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는 가장 의미심장한 ‘무딘 의미’의 뒤안길을 비추는 불빛이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중요한 삶의 지혜는 뜻밖에도 사전에 준비한 완벽한 틀이나 이론적으로 정교한 체계나 형식 속에 숨어있지 않다. 오히려, 마치 브리꼴레르가 난국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모아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장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 곁의 어른들은 삶의 현장에서 얻은 모든 경험을 소중한 재료나 발판으로 삼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방식으로 삶의 지혜를 전달해 왔다. 그들은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사전에 체계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완벽한 강의 노트를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좌절과 절망으로 토해낸 아픔, 성과를 올리며 성공했을 때의 짜릿한 성취감,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했던 애달픈 기억, 서글픈 한숨으로 뒤척이며 보냈던 긴긴밤, 이 모든 경험의 흔적들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시도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판단착오를 줄일 수 있는 소중한 삶의 지혜라는 작품을 빚어냈다. 때로는 미숙하고, 때로는 덜 성숙해 보였겠지만, 정제되지 않은 전달 방식 속에 가공되지 않은 삶의 민낯, 즉 ‘무딘 의미’가 오롯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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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무딘 의미’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브리꼴레르’의 안간힘이다.


어른의 전달력 자체를 완벽한 의미로 전달할 수 없는 언제나 미완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마치 수학문제를 풀 듯 정답을 제시하는 명쾌한 설명력이라기보다 여전히 미지의 의미를 품고 있는 뭉툭한 ‘무딘 의미’ 덩어리를 파헤치며 찾아내는 해답에 가깝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하나밖에 없는 정답의 세계가 아니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깨달은 지혜는 명확한 수학공식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무딘 의미’처럼, 그냥 어떤 ‘느낌’이나 ‘이지지’로 내 몸의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가 어느 날 그 의미의 심연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릴 때부터 무딘 의미의 언저리를 방황하기 시작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주어진 언어를 가공, 완벽하게 포장해서 위장한다고 높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의 전달력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마치 정제되지 않은 원석처럼 투박한 ‘무딘 의미’가 품고 있는 미지의 의미 덩어리 속에서 꽈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시대적 고민과 화두가 무엇이었으며, 당사자인 어른은 이런 상황에서 무슨 고뇌로 어렵고 힘든 삶을 헤쳐나가려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며 공감할 때 비로소 ‘무딘 의미’ 속에 가려진 의미의 껍질들이 하나둘씩 벗겨지며 비로소 그 정체가 밝혀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른들이 정답에 이르는 방법을 처방해 주었다면 전달받는 우리들은 정답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무딘 의미’ 상태로 그걸 곱씹고, 반추해 보고, 네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든다면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의미에 나의 경험적 깨달음이나 교훈으로 재해석할 때 비로소 어른의 삶의 지혜는 나의 삶의 지혜로 각인되는 배움과 익힘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어른들의 삶의 지혜를 전하려고 한다. 왜 어른들의 지혜는 명확한 언어 대신 ‘무딘 의미’로 축적되어 있는지, 이런 의미를 전달하는 브리꼴레르는 분명한 한 가지 정답으로 어른의 지혜를 축소시켜 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의 전달력은 ‘무딘 의미’ 속에서 잠자고 있는 숨은 의미를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여러 가지 해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달하는 가운데 모호함을 견디고 다양한 해석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데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눈먼 각인’으로 생긴 ‘무딘 의미’를 해석하고 전달하기 위해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의미를 심장에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브리꼴레르’의 안간힘의 다른 이름이다. 복잡하고, 때로는 불완전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은 어른들의 지혜, 어른들이 삶이라는 거대한 재료 더미에서 건져 올린 ‘눈먼 각인’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무딘 의미’를, 어떻게든 우리에게 건네주려는 그 ‘브리꼴레르’의 필사적인 전달 방식을 이 책에 담아보려고 애쓰며 썼다. 어른의 전달력은 어른의 삶의 지혜는 태생적으로 몇 가지 언어로 분명하게 정리될 수 없는 미완의 가능성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함께 탐구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길러지는 인생의 내공이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당신은 어른들의 모든 순간이 지혜를 담은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그걸 전달하는 최선의 방법은 ‘브리꼴레르’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 불확실한 미지의 ‘무딘 의미’의 정체를 한 꺼풀씩 벗겨나가는 고된 노동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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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지혜가 살아 숨 쉬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아주 정교한 설계도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마치 ‘브리꼴레르’처럼,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삶의 파편들로 꺠달음이라는 건축물을 쌓아 올리며 몸으로 체득한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정답이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를 숙고하고 행동하며 체득하는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모르는 딜레마 상황이나 회색지대에서 사건과 생각지도 못한 사고(事故)를 경험하며 생각지도 못한 사고(思考)가 바뀌는 과정에서 몸으로 익히는 지혜다. 어른의 전달력은 어른의 삶과 무관하게 생기지 않는다. 때로는 지난날의 아쉬움이 되고, 때로는 성공의 작은 조각이 되고, 때로는 그저 반복되는 하루의 고단함이 되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장 솔직한 진심이 어른의 지혜로 축적된다. 어른의 전달력은 이런 지혜를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비로소 살아 숨 쉬는 힘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투박하지만 진실된 ‘브리꼴레르’로서의 어른의 전달노력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들의 삶을 통해 새겨진 ‘눈먼 각인’들이 세월의 슬픔과 아픔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무딘 의미’를 만들어왔을 텐데, 그것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다시금 빛을 발하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하나의 정답만을 찾아 헤매는 시대에, 어쩌면 이 ‘투박한 미완성’과 ‘불완전한 전략’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와 통찰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자, 이제 그 어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다면 함께 삶의 지혜가 꿈틀거리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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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당신의 삶에도 우연히 ‘눈먼 각인’으로 아로새겨져 내 몸의 어딘가에서 지혜의 보물이 자라는 ‘무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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