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는 연습을 합니다
'인생ㅇㅇ'이란 말이 유행이다. 인생 드라마, 인생영화. 인생 요리.. 일생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무언가란 뜻일까? 너무 강렬해 잊지 못할 그런 것일까? 그렇담 이거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인생 수프는, 뜨거운 토마토 수프.
그날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먹는 걸 소홀히 한 대가는 꽤 혹독해, 그때의 나는 수시로 탈이 났다. 일본 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은땀이 났고 매스꺼웠다. 울렁이는 뱃속을 진정시켜야 했다. 따뜻한 무언가가 먹고 싶었다.
지도 앱을 켜 가장 가까운 가게를 찍었다. 작은 가게였다. 2인용 테이블 4개가 조밀조밀 차있는, 아주 작은 샌드위치 가게였다. 오늘의 수프와 오늘의 샌드위치, 약간의 쿠키가 준비되어있는 일본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런 가게. 아 이런, 운도 좋지. 얻어걸린 이 곳마저 찐 맛집이로구나. 느낌이 좋았다.
오늘의 수프를 시켰다. 매장에서 직접 굽는다는 빵 하나와 약간의 샐러드와 수프 한 그릇이 나온 댔다. 기대감에 아픔도 가시는 것 같았다. 일본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밑에 적힌 작은 설명들까지도 꼼꼼히 읽었을지 모른다. 컨디션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오늘의 수프는 어떤 수프냐고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못 만났겠지 나의 인생 수프. 삶에서 잊지 못할 기억들은 때때로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마치 이 날처럼.
하필이면 토마토 수프였다. 왜 하필 오늘, 사장님은 토마토 수프를 끓이셨을까. 토마토는 차갑게, 꿀 뿌려야만 겨우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물컹하고 시큼한데 뜨겁기까지 하면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낭패감이 치고 올라왔다. 기대감은 빠르게 식었고 식욕도 사라졌다. 아무 가게나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식은땀이 나도 메뉴판은 제대로 읽어봐야 했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이탈리아파슬리로 마무리된 시뻘건 토마토 수프. 수프를 괜히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시켰으니 먹어야지(음식을 남기는 건 죄악이다). 숟가락에 묻은 수프를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윽 토마토..... 어라 생각보다 괜찮은데? 뜨거운 토마토케첩 따위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약간 씁쓸하기도 하고 시큼하기도 했다. 부드럽고 단맛이 돌았다. 무엇보다 따뜻하고 편했다. 먹으면서 속이 가라앉는 걸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었다.
메뉴판을 다시 받아 찬찬히 읽었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메뉴판을 번갈아보며 끙끙대는 외국인 손님이 신기했는지 사장님이 말을 걸어왔다. '수프는 맛이 괜찮았나요?' 아주 맛있다고. 나는 쌍엄지를 치켜들며 오이시를 연발했다. 수프에 무얼 넣어서 이렇게 맛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나의 일본어 실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서로 아는 단어를 내뱉고 보는 웃음만 나는 대화이었지만, 모든 게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서점에 들러 수프 책을 몇 권 샀다. 그리고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토마토가 나오는 계절엔 토마토 수프를 끓이고 고구마가 나오는 계절엔 고구마 수프를 끓인다. 수프는 종류가 많다. 끓여도 끓여도 새롭다. 건더기가 있는 수프, 곱게 갈아 부드러운 수프, 크림을 넣어 진득하고 입에 붙는 수프, 맑게 끓여 후르르 마시는 수프. 넣고 싶은 재료들을 몇 가지 넣고 끓이다 보면 수프가 완성된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종종 그 날의 수프 기억이 난다. 뜨끈한 수프를 후르르 먹는 상상을 한다. 그날처럼 맛있는 토마토 수프는 아직 끓이지 못했지만 나는 나만의 토마토 수프를 끓이는 중이다.
today's soup ; 토마토 야채수프
그 날의 기억 탓일까. 많고 많은 수프 중 나는 토마토 수프를 가장 좋아한다. 토마토를 싫어하던 과거의 나는 놀라도 너무 놀랄 변화다. 토마토 수프를 끓일 땐 샐러리를 꼭 넣자. 토마토와 샐러리는 궁합이 좋아 수프의 맛을 눈에 띄게 바꾼다. 든든하게 먹고 싶다면 병아리콩이나 흰 강낭콩을 조금 넣어도 좋고 씹는 맛을 즐기고 싶다면 야채를 큼지막히 썰면 된다. 베이스를 닭 육수로 하면 토마토 수프가 아직 낯선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수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정답은 없다. 좋아하는 재료들을 넣고 보글보글 수프를 끓여 먹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