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뉴욕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솜대리 Nov 07. 2024

역대급 플레이데이트, 대단한 딸내미_241105

미국생활 444일 차



오늘 일기는 미국 대선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선거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미국은 선거일이 공휴일은 아니었지만 학교는 쉬었다. 뭘 할까 하다가 기온이 25도까지 올라간다길래 (기후 위기!!) 올해 마지막 센트럴파크 피크닉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피크닉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고, 이웃해서 살 때 신세 많이 진 시드니네도 본 지 오래돼서 피크닉에 초대했다. 그 집 엄마는 일하는 날이라고는 했지만, 기왕 말 꺼낸 거 같이 놀고 우리 집에서 점심까지 먹기로 했다.


하… 나가려는데 둘째가 먹고 싸고 하느라 나는 좀 늦게 출발했다. 나는 어차피 애들이 놀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는 길에 선거 장소 사진도 찍어가고 (이 정도로 오늘 일기는 선거가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언제 오냐는 것이다. 보통 이런 재촉 전화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왜냐고 물으니 일단 와보면 안단다. 불안해서 발걸음을 빨리 해서 가보니… 첫째는 뚱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시드니를 시드니 아빠가 쫓아가고 있었다. 시드니 아빠에게 갔더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네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겠니? 아니면 우리 요즘 이런 거 감당 안돼서 가야 할 것 같아’ 란다. 응???


투표장 입구 사진. 플데 사진은 없다. 찍을 정신이 있었을리 만무하다…


상황을 알고 보니, 안 그래도 사회성이 떨어지고 ADHD가 있던 시드니인데 요즘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아이가 감정조절이 안된단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9월부터 학교도 바뀌고 우리도 이사를 와서 자주 얘기를 안 해 몰랐다. 그런 와중에 오늘 만났는데, 시드니가 인사했는데 딸내미가 인사를 안 받아줬단다. 그랬더니 폭발해서 ‘She hates me!!!!’ 하면서 저렇게 뛰어다니고 있단다. 딸내미는 당황스러워서 근처에도 안 가고 있고. 심지어 이 얘기를 하며 시드니 아빠는 내 앞에서 펑펑 울었다.


와… 이렇게 가면 시드니네랑은 끝이었다. 뭐 끝이면 끝인데, 이제까지 시드니네한테 신세도 많이 졌는데 이렇게 끝이면 안 됐다. 딸내미를 안고 살살 달랬더니, 자기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자기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아빠가 자꾸 시드니 왔으니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아빠한테 화가 났었다고. 보니 딸내미는 아빠한테 삐져서 뚱해서 인사를 안 받았던 것 같다. 상황을 잘 설명하고 오늘은 같이 놀기로 했으니 시드니한테 간식을 나눠줄까? 했더니 그러겠다고 해줬다. 그래서 시드니한테 가서 간식을 내밀었는데… ‘No!!! I want to go home!!!’. 시드니 아빠는 또 당황에서 허둥허둥하고 우리는 다시 황당하고. 그래도 딸내미가 다시 힘내줘서 시드니를 꼬셨고 (스낵 같이 먹자, 이 스낵 맛있으면 더 먹을래, 저기 가서 같이 놀자 등등 내가 부탁한 말들을 다 해주었다.), 결국에는 같이 스낵을 나눠먹으며 풀었고 함께 놀기 시작했다.


글로 뭐 짧게 쓴 거지만… 딸내미한테 잘 설명하면서도 시드니를 달래면서도, 그 와중에 세 번이나 울음이 터진 시드니 아빠까지 살피며… 난리였다. 그래도 상황을 수습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딸내미가 고마웠다.


그 이후로도 쉽지가 않았다. 시드니는 신발도 안 신고 뛰어다니다가 똥을 밝고 그 발로 우리 돗자리로 올라가서 결국 돗자리를 버렸고, 돗자리를 수습하려던 남편은 똥냄새 풀풀 풍겼다. 챙길 사람은 애 셋에 어른 하나 (첫째, 둘째, 시드니, 울고 있는 시드니 아빠) 였는데 똥을 묻힌 남편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ㅋㅋㅋ 게다가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시드니는 양말과 바지에 똥을 묻혀서 오고 ㅋㅋㅋ 보통은 그러면 남의 집에 안 갈 텐데 미국 사람들은 워낙 신경 안 쓰고 시드니 아빠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냥 왔다… 안 들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가자마자 온 집안을 소독했다…3시간 같이 있었는데 그 3시간으로 나, 남편, 딸내미 다 뻗었다.


그래도 시드니네를 만나길 잘했다 싶었다. 시드니 아빠가 ‘우리가 너네한테 빚졌다’라고 표현을 할 정도로 고마워했다. 요즘 시드니가 감정 조절이 안되면서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시드니를 싫어하고, 모든 가족들이 멀리하고, 수시로 학교에서 데려가라거나 상담하자고 연락이 온단다. 심지어 교장도 만났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긍정적인 경험이 꼭 필요했다고 한다. 누군가와 편하게 같이 노는 경험. 몇 번이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시드니 아빠에게도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시드니 아빠는 파트타임으로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시간이 없고, 요즘엔 여력이 없어 친구들과 연락도 잘 안 한다는데 우리랑 만나서 그래도 조금 풀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 아플 때면 늘 의사인 시드니 엄마가 적극적으로 도와줬고, 수시로 집에 초대받았고, 공구 하나를 빌려도 그 집에서 빌렸기 때문에 그 집에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딸내미를 다시 봤다. 애들끼리 인사를 안 받아주는 건 진짜 부지기수인데, 인사에 한 번 답 안 했다고 이 사달이 났다. 친구는 ‘She hates me!!!!’ 하면서 뛰어다니고 그 집 아빠는 울고. 얼마나 당황하고 부담스러웠을까 싶다. 그래도 엄마 아빠의 입장을 들어주고 이해해 줘서 시드니한테 먼저 다가가줬다. 딸내미가 진짜 어른스럽게 굴어줬다. 정말 성숙한 태도였다고 많이 칭찬해 줬다. (칭찬해 주면서도 혹시 매번 이런 상황이 주변에서 일어날 때마다 스트레스받을까 봐 걱정돼서, 이번이 특별한 경우임을 강조했다. 진짜 육아란 쉽지가 않다…)


그때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딸내미는 저녁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칭얼거리고 울었다. 그래도 진짜 그 순간을 잘 견뎌내고 해결한 것만 해도 대단했다. 딸내미를 혼내려고 폼 잡는 남편을 물리치고 안아줬다. 이 정도면 내일까지는 애가 말도 안 되게 칭얼거려도 봐줘야 한다. 어른도 엄청 스트레스받고 힘들었는데.


딸내미가 내 상상 이상으로 멋진 아이로 자라줬구나 고마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착하고 싶다_24110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