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주차] 엄마가 준 콩국물

음식임신일기

by 솜대리




더운 여름에는 후루룩 넘길 수 있는 국수가 제격이다. 여러 국수 중에도 나는 콩국수를 특히 좋아한다. 콩국물의 고소한 맛과 고명으로 올라간 오이의 향긋함의 조합이 좋고, 갈린 콩이 입에서 걸리는 식감도 재미있다. 게다가 국수를 먹고 나면 금방 헛헛해지기 마련인데 콩국수는 걸쭉한 콩국물 덕에 든든하다.


다른 친정 식구들도 모두 콩국수를 좋아해서, 여름이면 엄마는 자주 콩을 갈았다. 드륵드륵 믹서기 가는 소리가 나서 부엌에 가보면 엄마가 콩을 소반 가득히 삶아놓고 갈고 있었다. 콩 간 것은 냉동해서 먹을 수 있어 한 번에 10인분은 갈아두지만, 워낙 자주 먹다 보니 여름 내내 콩가는 소리가 멈출 날이 없다.


친정에서 하룻밤 자던 날 밤부터 콩을 불려놓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내일도 콩국수를 먹는 모양이다 생각했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드륵드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8시도 안되었는데. 점심 준비를 벌써 하나 생각하며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나서는데 엄마가 콩국물을 넣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쫓아 나왔다. 가져가서 콩국수를 해 먹으라는 것이었다.


"이거 다 상할 텐데?"

"아이스팩 넣었어. 차 트렁크에 두면 되지."

"더워서 아이스팩도 금방 다 녹을 거란 말이야. 가지고 가려면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둬야 되는데, 안 들고 갈래."

"이제 주말이잖아. 가져가서 콩국수 해 먹어, 국수랑 오이도 넣었어."


몇 차례 왈가왈부하다 결국 아이스박스를 받아 들었다. 아침부터 콩을 삶고 간 엄마를 생각해 차마 거절하진 못했지만,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툴툴거렸다. 회사에 가져가기 민망하단 핑계를 댔지만 사실 문제 될 건 없었다. 한 직장에서 10년이 다 돼가다 보니 어지간해서 민망할 일은 없다. 점심시간에 엄마가 회사 앞으로 먹을 걸 가져다주면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가져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 날도 결국엔 집까지 잘 가져가서 국수를 삶아 넣어 호록 호록 맛있게 먹었다. 생각해보면 30이 훌쩍 넘어 엄마에게 아침 잠투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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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이렇게 불공평한 관계도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애써 챙겨주는데도 툴툴거리다니. 친구가 그랬다면 바로 관계 단절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상황은 자주 반복된다. 그런 나 자신이 민망하다가도 주변을 둘러보면 다른 모녀관계들도 크게 다를 게 없어, 모녀관계는 원래 그런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딸에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상대다. 여기서 편하다는 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밑도 끝도 없이 짜증을 내거나, 원망하는 대상이 되곤 한다. 딸이 유달리 엄마한테 잘해줄 때는 이제까지 낸 짜증이나 원망이 미안하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 엄마가 안타깝거나 할 때인 경우가 많다. 어떤 쪽이든 긍정적인 시선은 아니다. 친구 같은 관계든, 데면데면한 관계든 그 관계 속에는 이런 감정과 시선들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내가 곧 엄마가 된다. 그것도 딸 가진 엄마. 그러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내 딸이 나를 그렇게 느끼고 바라보는 건 좀 싫을 것 같다. 딸이 동경하는 쿨하고 멋진 엄마, 이런 건 없을까? 어떻게 하면 딸이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을까? 이런 시선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가족끼리는 서로 너무 속속들이 알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엄마의 역할 때문에 그런 걸까? 그렇다면 그 시선은 우리 세대에선 바뀔 수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반대의 경우는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딸은 어떤 존재일까? 투덜거리는 딸을 어르고 달래서 콩국물을 쥐어주면서 엄마들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시선으로 딸을 볼까? 어째서 평생을 어르고 달래며 쫓아다닐 수 있는 걸까?


전혀 모르겠다. 딸이 엄마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순식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가 딸을 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하려니, 세상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고 들었을 때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딸이기 때문에 딸이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와 딸의 관계라면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익숙한 건 딸이라는 역할뿐이었다. 엄마가 보는 딸은 어떤 존재인지,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시원하게 얼음 동동 띄운 콩국수를 호록 호록 넘기면서도 갑갑함이 가시질 않았다.


나,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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