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졌다
점심 한 번 하시죠
출입처를 배정받고 처음으로 홍보부장과 점심 일정이 잡혔다. 굉장히 떨렸다. 이전 대행사 직원들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다. 그땐 나이도 나보다 어린 사원들이라 부담이 없었는데...
심지어 홍보부장과 1대 1 식사자리다. 부담감이 몰려왔다. 해당 홍보부장은 홍보만 10년 이상한 베테랑이라는데...
난 전투태세를 갖춰야 했다. 온라인 매체, 그것도 신생 매체라고 우습게 볼까 두려웠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으니...
사실 오기가 생겼다. 이전에 한 차례 당한 게 있어 두 번 다시는 그런 모멸감을 겪고 싶지 않았다.
최근 5년간 이슈 정리
난 또다시 전자공시시스템을 뒤지기 시작했다. 현안과 오너 이슈까지 샅샅이 살폈다. 기사들도 죄다 검색해서 찾아냈다. 출력해보니 A4용지로 몇백 페이지가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많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려움
홍보부장 정도가 되면 자기가 속한 그룹사뿐 아니라 경쟁사에 대한 이슈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알고 헛소리를 해대면 망신당할 게 뻔했다. 아는 척하는 것은 더 최악이었다.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이 기자는 뭔가 다르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어찌 보면 신생매체로 입사해서 생긴 열등감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해당 그룹 이슈를 정리하는 데에만 2주가 걸렸다. 줄이고 또 줄였다. 기자 수첩 한 장에 모든 이슈를 구겨 넣어야 했다. 저쪽에서 '아'하면 '어'할 정도로 외워야 한다는 스스로 강요했다. 강박관념이 심했다.
만나러 가기 1시간 전
한 페이지로 요약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외우지는 못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커닝종이를 만들었다. 기자 수첩에 적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잠시 문자 확인하는 척하며 꼼수를 부릴 요량으로...
두둥...
결전의 시간이다. 장소는 회사 근처 일식집. 칸막이가 돼 있는 식당이다. 산업부장을 따라 종종 갔던 곳이었다. 홈그라운드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왼손에는 커닝종이를, 오른손에는 휴대전화를 꽉 쥐고 식당으로 갔다.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홍보부장은 이미 도착해 앉아 있었다.
악수하고 인사를 나눴다. 마른 체격의 부장이었다.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줬다. 난 굳은 결의에 찬 표정... 사실 긴장해서 어색하게 짓게 된 웃음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자..아...앙...구...운이요....
어랏???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식탁 아래로 커닝종이를 펼쳐놨다. 힐끔힐끔 쳐다볼 수 있는 위치에... 휴대전화 위치도 확인했다. 혹시 몰라 앨범 단축키도 꺼내놨다.
모든 세팅은 끝이 났다. 이제 난 나의 내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됐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떠벌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기 전 물잔을 들었다. 성대를 촉촉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맑고 까랑까랑한 저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일만 남았다. 난 흐뭇하게 생각했다.
'이제 당신은 나의 내공에 혀를 내두르게 될 거야'라고...
물을 들이켰다. 이제 해당 업체에 대해 조사해 온 내용을 또박또박 읊기만 하면 됐다. 두 눈에 힘을 주고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하려는 순간...
집은 어디세요?
부장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끌었다. 사는 곳부터 시작해서 본인의 가족 얘기, 날씨 얘기와 사는 얘기 등등...
처음엔 말을 생뚱맞게 끊을 수 없으니 화제 전환이 될 타이밍을 기다렸다. 상대방과 대화라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시작할 때를 노렸다. 당연히 대화는 원활하지 않았다.
내 행동도 부자연스러웠으리라 짐작된다. 불안한 듯이 왼손으로 커닝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날씨도 좋은데...
공장 얘기는 나중에 하시죠!
허를 찔렸다.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나 보다. 마치 프로게임에 아마추어가 뛰어든 경기처럼...
당시를 생각해보면 완전 웃긴다. 표정은 어색하게 웃고 있고, 눈빛은 뭔가 때를 기다리듯이 결의에 차있고, 상대의 말에 집중하지도 않고, 손은 산만하게 뭔지모를 종이를 계속 만지며 꼼지락거리고 있고......
내가 상대였으면 참 우스웠을 것 같다. 아니면 한마디 했을지도... '너 뭐 잘못 먹었니?'라고...
완패
순간 흠칫했다. 허탈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내가 뭐하고 있나'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수줍은 신입 기자로 돌아왔다.
그제야 홍보부장과 난 진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강박관념을 버리니 메인 요리로 나온 회의 식감이 느껴졌다. 대화의 즐거움도 알게 됐다.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대화. 서로에 대해 알아나가는 시간...
부장은 커리어우먼이었고 집은 남산이었다. 육아하면서 직장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에 대한 고충... 그때 이야기했던 것들을 난 이제서야 조금씩 이해하고 경험하고 이해하고 있다.
에필로그
그때 이후로 전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먼저 생각하게 됐습니다. 식사에도 예절이 있고 대화에도 예의가 있으니까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당시 제 모습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낮은 자세로 만납니다. 어차피 새로 출입한 거 상대도 다 아니까요.
사실 당시에 과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상대방은 출입기자가 누구인가 한 번 만나러 온 걸 수도 있는데 저는 싸우자고 덤볐으니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초년병 시절 소중한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