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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1승이 필요해

[영화《1승》리뷰] 날 인성을 상대하며 마음이 무너져버렸어

by 광화문덕

비가 내릴 듯 말 듯, 하루 종일 눅눅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늦봄의 저녁은 여전히 서늘했고,
회색 구름은 서울의 하늘 위에서 내려올 듯 말 듯 머뭇거리다,

결국 그저 떠다니기만 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걷고 있다.

아니, 그저 걷고 싶었다.

무언가를 털어내듯.


지나치게 짙어진 스트레스는,
결국 내 삶의 숨통을 죄어왔고
나는 작은 휴가를 핑계 삼아
몸과 마음을 데리고 대만으로 향했다.


타이베이의 낯선 거리,
낯선 언어, 낯선 공기.
그곳은 나에게 시간을 내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 시간을 ‘쉼’으로 채우지 못했다.


호흡을 달리하고 시선을 바꾸었음에도,
마음 한편에선 여전히 숨 막히는 불안이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내 속을 잠식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과연 나는 다시 잘할 수 있을까.
이전의 나처럼, 아니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비행기 좌석에 등을 기대고,
조여 오는 심리적 압박을 견디려
기내 영화 목록을 훑던 중
문득, 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1승》.

그 단순한 숫자 하나가
왜 이토록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 걸까.



너무도 뻔한 스토리일 것 같았지만,

내게도 작은 성취감을 통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는 것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돼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 속 감독은
패배가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2군, 벤치, 그늘.
자의든 타의든 밀려난 자리.
자신을 스스로 지우며 살아온 시간들.


그들은 오랫동안

따뜻한 말에 익숙해질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비아냥과 무시, 반복된 패배의 말들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점점 방어적인 침묵으로 굳어갔고,
언젠가부터는 상처보다 상처를 예감하는 쪽에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미 오래전에 닳고 닳아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건
‘나는 안 돼’라는 낮고 어두운 자기 확신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외부의 억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쌓은 벽에 갇혀
스스로의 가능성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감독은 그들이 수년간 익혀온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그들의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 순간, 내 안 어딘가에서

낡고 지친 내면이 속삭였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잘못된 포지션일지도 몰라
날 것의 인성 앞에 서
부당함을 표출하지 않고 항상 감내만 하려 했던 내 포지션”


요즘의 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새로운 업무. 낯선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


“내가 이 일 20년 했어. 너희 같은 애들은 몰라.”



익숙한 말투. 익숙한 표정.
늘 웃으며 시작되지만,
결국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찔러왔다.


처음엔 흘려보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지속된
그 사람의 말투는 독이 되어
내 안으로 충분히 스며들었다.


나는 병들고 있었고,
그가 내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영화 속 선수들은 포지션을 바꾸고

처음엔 헤매고, 반발하기도 하다가

결국 서로의 장점을 찾아내며 서서히 빛을 얻는다.


나는 희망이 아닌, 위안이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내 단점을 지적하는 대신
단 한 줄이라도,
내 안의 가능성을 먼저 바라봐주는 시선.


감독은 말했다.

“단점은 아무나 말할 수 있어.
아무나 말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돼”


패배하는 이들을 향해

비난과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

감독은 그들에게 토로했다.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이길 마음이 없다고, 이길 마음이
맨날 지니까
맨날 이렇게 욕해 대니까
응원을 해주셔야지 응원을


그 말이,
마치 나를 흔드는 작은 망치처럼
가슴 한복판에 꽂혔다.


나는 요즘 ‘독을 빼는 훈련’을 하고 있다.
아침마다 창을 열고,
내 안에 작지만 단단한 문장을 하나씩 새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다.
지금은 잠시,
내가 나를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다.
다시, 찾아가면 된다.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이기적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내가 속한 곳에도 두 부류가 존재했다.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요즘 내가 훈련하는 것이 바로

영화 속 ‘1승’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영화 속 ‘1승’ 같은 것들을 훈련하고 있다.


작은 일 하나.
작은 미소 하나.
작은 친절 하나.


그 작은 것들이 쌓여
어느 날, 인생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파도가 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파도를 향해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다시 알아보는 일.


한때 빛났던 나를
지금의 내가 다시 불러내는 일

그게 지금 내게는 가장 중요하고 절실하고 시급한 일이다.


나는 언젠가,

영화《1승》 속 감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너네가 어떤 선수인지 알게 되면
1승이 아니라 100승도 할 수 있어”


“너희들이 어떤 선수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어떤 선수인지 알게 되면
다음에 내가 뭘 할지가 보여”


잘하는 이보다
부족한 이가 더 많은 세상.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배우고 익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있다.


한국, 인천공항.
입국 게이트를 지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은 이미 깊었고,
어둠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조용히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빛은 포기하지 않았다.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은은한 빛으로 다가와 주고 있었다.


어쩌면, 비는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저 구름조차
이제는 물러날 줄 아는 지혜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고요하고 묵직한 밤의 끝자락에서,
내 안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작은 목소리 하나가
조심스레 깨어나 속삭였다.


“괜찮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나의 인생도
이제 막,
첫 번째 승리를 시작하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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