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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두 명의 빈카운터: 셀 앞에서 마주한 자아

숫자가 기억하지 못한 것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

by 광화문덕

9월 19일, 오후 2시.
본사 전략기획실 B열 회의실.
두 명의 ‘한기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사에서 올라온 기윤은 어색한 땀을 훔쳤고,
본사 기윤은 커서를 쥔 손끝을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엑셀 파일이 열려 있었다.

‘A-급 식자재 분석표_지사.hgy’
‘통합 식자재 최적화안_본사.ver.4.7’


지사 파일에는

‘콩 섭취율 36%’,

‘폐기율 63.8%’,

‘연간 손실 추정 84만 원’

이라는 수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래엔, 기윤이 작성했던 보고서 제목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콩을 줄이면 미래가 보인다〉


본사 파일은 달랐다.
익숙한 수치 옆에, 지사에는 없던 항목들이 추가돼 있었다.

식자재별 감정 인식 기여도 점수 (Emotional Utilization Index)

퇴사자 발생률과 식단 구성의 상관관계 (3개월 시계열)

보고서 노출 이후 팀원 간 대화량 변화 로그


단순히 비용과 손실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 패턴까지 수치화한 기록,

일종의 ‘감정 로그(Emotional Log)’가 덧붙어 있었다.


지사 기윤은 파일을 보며

처음으로 셀을 닫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당신이 만든 거예요?”


지사 기윤이 물었다.


본사 기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만든 방식 위에, 감정 로그를 얹었어요.”


“…왜 감정을 수치화합니까?”

지사 기윤이 다그치듯 물었다.


본사 기윤은 잠시 커서를 멈췄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사 파일의 ‘감정 로그’는 몰래 녹음한 게 아닙니다.
직원들에게 미리 알리고, 동의받은 뒤에 진행한 설문 응답,
그리고 퇴직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모아 통계로 정리한 겁니다.
원문은 남기지 않았고, 결과는 팀 단위의 점수로만 남겼습니다.
법무와 노사, 외부 감수까지 거쳐 합법적으로 만든 자료입니다.”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


“당신이 지운 게 감정이었으니까요.”


지사 기윤은 잠시 입을 닫았다.
셀은 오류 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는 #REF!처럼 깜빡이는 공백이 생겼다.


지사 기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그는 낮게 말했다.


“당신 파일엔 감정 로그가 있군요.
하지만… 제 보고서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어갔다.


“그날, 점심시간 기록에 73분이 찍혔습니다.
제 파일엔 단순히 ‘비효율’로 남았죠.

그 한 줄이, 결국 한 사람을 밀어냈습니다.”


본사 기윤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 이름이, 조유진이었나요?"


지사 기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아십니까.”


본사 기윤이 답했다.


“그분, 우리 데이터에도 있습니다”


그는 화면을 돌리며 엑셀의 한 시트를 보여줬다.

‘비정형 셀 대화 로그_재구축 시트’

그 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복원되어 있었다.


“기윤 대리님, 저… 그냥 같이 걷고 싶다 해서요.”
“그건 기록 안 되죠?”


지사 기윤은 숨을 멈췄다.

그 문장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반복되던 말이었다.
셀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감정은 데이터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떻게...."


본사 기윤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원문이 남아 있던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남긴 짧은 설문 답변,
메신저의 반응 패턴,
퇴직 면담 내용들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그 분은 그 한 줄로 인해, 결국 조직에서 떠났습니다.

당신의 그 한 줄에는

73분 동안 나눈 대화, 표정, 주저함…

그러한 부분은 어느 셀에도 저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말했다.


“콩을 줄이는 건 쉬워요.
사람을 줄이는 것도, 훈련하면 익숙해지죠.
그런데...
숫자로 줄여버린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도...

해봐야겠죠.”


그날 오후, 지사 기윤은 처음으로 커서를 멈췄다.
그리고 보고서 제목을 다시 적었다.


〈콩을 줄이면 미래가 보였다.
그러나 감정을 지우면,
그 미래에 나는 없었다.〉


그는 저장을 누르지 않았다.
다만, 화면을 캡처해 데스크탑 한 구석에 남겼다.
폴더 이름은 이렇게 바꿨다.


“콩이 아니라, 사람”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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