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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리포트 상경: 본사 프로젝트 호출

셀 바깥으로 나왔더니, 여긴 더 거대한 셀이었다.

by 광화문덕

9월 16일 아침 9시.
한기윤은 ‘회계2팀_비용분석_보류’ 폴더를 닫고 자리에 앉았다.
그날따라 식자재 단가 셀의 색이 유독 흐리게 보였다.
익숙했던 조건부 서식이, 낯설었다.


잠시 뒤, 통합공지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이렇게 시작됐다.

[본사 인사발령] 백오피스 구조 혁신 Taskforce 발족 안내
발령자 목록:
한기윤 (식자재관리 담당 → 전략기획실 분석 파견)
서종우 (총무과장 → 통합결재체계 운영팀 파견)
최유상 (데이터분석실 선임 → 정책 수치검증TF)
윤성재 (인사전략 차장 → 구조혁신 자문단 상근)


지사에서 무심히 사람을 정리하던 네 명이,
이제 본사의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하라’는 임무를 받고 올라간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이미,

자신과 똑같은 네 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9월 17일. 본사 2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은 한 명씩 지정된 자리로 안내된다.
복도 끝, 이름 대신 사번만 적힌 출입증.
안내 직원은 말했다.


“TF 멤버들의 ‘업무 유형’에 따라,
‘기존 본사 백오피스 실무진’과 매칭되어 있습니다.”


한기윤은 고개를 들었다.


“…매칭이요?”

“네. 비슷한 성과 유형, 비슷한 업무 판단.
이전에 비슷한 방식으로 셀을 다뤘던 분들이죠.
‘상호 리뷰’를 위한 조치입니다.”


매칭 정보 요약:
한기윤 ↔ 본사 ‘기윤’
서종우 ↔ 본사 ‘종우’
최유상 ↔ 본사 ‘유상’
윤성재 ↔ 본사 ‘성재’


그들의 이름이 거울처럼 붙어 있었다.

하지만 한 자씩 미묘하게 달랐다.
셀을 다루는 방식도, 판단의 속도도, 그 안의 감정도.



회의실 B-17, 오후 2시


첫 매칭 세션이 열렸다.
네 명의 지사 직원과 네 명의 본사 직원이 마주 앉았다.

거울 앞에 선 듯한 정적이 공기를 눌렀다.


“오늘은 서로의 대표 리포트를 리뷰해보는 자리입니다.”


기조실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본사 팀은 ‘셀 내부 기준 최적화’ 측면에서,
지사 팀은 ‘현장 기반 사례 검토’로 의견을 주시죠.”


서류가 한 장씩 배부됐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봤다.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방식을 모방해 더 정밀하게 다듬어 놓은 파일.


한기윤은 중식 A식단 셀을 열었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수식이 삽입되어 있었다.

=IFERROR((1-폐기율)단가기여도계수,0)


그는 손을 멈췄다.
분명 자신이 만든 공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익숙했다.
아니, 오히려 자기보다 더 자신 같았다.

그리고 파일 하단에 적힌 문장.


"셀은 감정을 지우기 위해 존재한다.
감정이 개입된 순간, 수치는 오염된다."


그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2년 전 ‘정연 사건’ 이후, 기윤이 마음속에서 되뇌던 말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언어 습관이, 누군가의 손을 빌려 그대로 드러난 듯했다.


기윤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셀은 분명 복제됐다.
그리고, 사고방식조차 복제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네 명은 각자 지정된 휴게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같은 발령, 같은 구조, 같은 과거.
그러나 단 하나 달라진 것.

이제는, 자기 자신이 판단받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윤성재는 지하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다
벽면에 붙은 리스트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평범했다.

“조직 내 고정비 최적화 권고안”


하지만 문서 하단 코멘트란에
이상한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코스트 커터 리뷰 버전”


그는 눈을 의심했다.
사내 문서에 쓰일 리 없는,
자신이 불리던 별명이 그대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남들을 정리하던 그 이름이,
이제는 자신을 겨누고 있었으니까.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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