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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잉크가 마른 종이: 두 명의 펜슬푸셔

“책임은 말 없는 결재란에 어떻게 남는가”

by 광화문덕

9월 20일, 오후 3시.
본사 결재관리실 B-12 방.
두 명의 ‘펜슬푸셔’가 마주 앉아 있었다.


지사에서 올라온 서종우의
서류더미를 정리하는 손끝은 익숙해보였다.
결재란을 넘길 때 줄 간격을 확인하고,
페이지 번호를 체크하며 잉크 번짐을 피했다.


반면, 본사 서종우는 느릿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 반드시 제목을 중얼거렸다.


“직무 전환 요청서…
조직 재편 보고서…
직원 이의 신청서…”


지사 종우가 낮게 물었다.


“도장은 언제 찍으십니까?”


본사 종우는 잠시 멈추더니 천천히 말했다.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가끔은… 안 찍습니다.”


지사 종우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결재를 안 한다는 건가요?”


“아뇨.
결재 대신,
그 사람의 문장을 한 번 더 남깁니다.”


그는 파일을 열어 보여줬다.
결재 문서 하단,

일반적으로 비워두는 ‘비고란’에
손글씨로 적힌 문장이 있었다.


본사 종우는 고개를 들고 단호히 말했다.


“이 도장을 누르면, 한 사람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당신이 보는 그 문장이,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지사 종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문장은 익숙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문서에 남긴 적이 없었다.


본사 종우는 잔잔하게 말했다.


“책임은

도장을 찍는 게 아니라,
도장을 찍지 않는 순간에도 남습니다.


어떤 도장은,

찍지 않는 게
결정이 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 순간,
지사 종우의 뇌리에 떠오른 건
박도윤이었다.


퇴사 전날, 커피를 건네던 손.
말없이 고개를 숙이던 뒷모습.
그리고 책상 위, 자신이 찍은 도장 옆에 남겨진
사직서 복사본의 잉크 번짐.


그 잉크는 아직도
그의 손바닥 안쪽에서 말라붙지 않은 듯했다.


회의가 끝난 뒤,
지사 종우는 조용히 복사기 앞으로 갔다.
오래된 문서함을 뒤져,

자신이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은 문서를 꺼냈다.


“조직 재편 통보_1차”
대상자: 박도윤


하단 비고란은 비어 있었다.
정확하게 정리된 셀, 완벽한 정렬,
그리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공간.


그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적었다.


“당신을 내가 기억합니다.”


그 문장은
공식 문서로서의 효력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것은
그가 서류 위에 남긴 첫 번째 ‘말’이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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