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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데이터의 그림자: 두 명의 넘버 크런처

‘수치의 경계 바깥’에서 지워졌어야 할 사람

by 광화문덕

9월 27일 오후 1시.
회의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창문은 블라인드로 내려져 있었고,

낮 햇살은 희미한 줄무늬만 바닥에 새겨놓았다.

공기는 눅눅한 정적에 잠겨 있었고,

천장의 형광등이 가늘게 윙윙거렸다.


본사 유상은 자리에 앉자마자

분석팀장이 건넨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이 열리자, 화면에 제목이 떠올랐다.


‘조직 유효성 분석 최종모델_v5.8’
설계자: 본사 유상


옆자리에 앉은 또 다른 유상.

지사 출신의 최유상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같은 이름, 같은 알고리즘.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이건… 제 모델 아닙니다.”


최유상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억눌린 긴장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맞아요. 하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바꿨습니다.”

본사 유상은 무심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가 셀 위에 멈추더니, 함수가 드러났다.


“보시다시피 감정지수 조건을 추가했어요.

예전엔 없던 거죠?”


순간, 회의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최유상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늘 믿어왔다.

감정을 모델에 넣는 순간, 수학적 순도가 흐려진다고.

데이터는 차갑고 명확해야 했고,

감정은 오차와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본사 유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계산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정리 대상 1순위는 김세진 과장입니다.

성과, 기여도, 복지 이용률, 모두 평균 이하.
기록상으론 감정적 개입이 높고,
협업성도 낮은 축입니다.”


마치 재판관의 판결문처럼,

무표정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 사람, 직접 만나보셨습니까?”

최유상이 물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다.


“…데이터로 충분합니다.”
차갑게 돌아온 대답은

마치 금속성 울림처럼 회의실 벽에 튕겨나갔다.


회의실을 나온 최유상은

자리로 돌아가 곧장 컴퓨터를 켰다.

김세진의 퇴사 로그를 다시 불러왔다.

스크롤을 내리던 그의 눈이 한 줄에 멈췄다.


“신입 교육에 자발적으로 참여.

면담 중 새로운 아이디어 제안.

대화량↑, 신입 만족도↑.”


엑셀 표 안에서 유일하게 숫자가 아닌 문장이었다.

최유상은 그 문장을 마우스로 긁어내려 복사하더니,

새 탭에 붙여넣었다.

데이터라기보다는 누군가의 흔적, 기억을 저장하듯이.


그때 본사 유상이 최유상 자리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본사 유상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났다.


최유상은 답했다.

“숫자는 모든 걸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건… 설명이었습니다.”


그날 밤,

사무실의 불빛은 거의 꺼져 있었고,

유일하게 최유상의 자리 모니터만 푸른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최유상은 자신이 설계했던 모델을 다시 열었다.

성과 점수, 근태 기록, 메신저 사용률…

모든 수치가 정갈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셀,

EmotionIndex에 다다랐을 때.

손끝이 멈췄다.


그는 그 칸을 지우지도,

새로운 값을 넣지도 않았다. 대신 빈칸으로 남겼다.


삭제가 아닌, 인정의 방식.

비워둠으로써 존재를 살려두는 선택.


그는 파일을 새 이름으로 저장했다.


Organism_Model_v0.1


최유상은 파일명 아래, 메모도 남겼다.
“수치는 닫힌 구조지만, 사람은 열린 변수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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